시황제가 태어나다⑦

하지만 답답한 것은 진나라에 들어간 여불위도 마찬가지였다. 자초는 태자 신분이었으므로 매일 같이 궁녀들을 접하고 있었다. 조나라에 부인과 아들을 두고 온 사실조차 망각하고 그들과 화려한 밤을 보내기 일쑤였다. 게다가 궁녀들과의 사이에서 또 다른 자식이 태어남에 따라 영정과 아내 조희는 여불위가 일깨울 때만 그리워할 뿐 평상시에는 잊고 사는 것이 보통이었다.

더욱이 조희를 태자비로 옹립해야 한다는 여불위의 주장도 걸림돌이 많았다. 자신의 애첩이었다는 것을 알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마당에 그녀를 태자비로 삼는다는 데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것이 도리어 이상할 지경이었다. 조정에서는 연일 태자비 문제가 거론되고 있었다.

“그분을 태자비로 모시는 것이 법도에는 어긋남이 없다고 할지라도 도덕적으로는 온당치 않다고 보여집니다. 백성들 사이에 좋지 않은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 인사를 태자비로 모심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사려 되옵니다. 거두어 주시옵소서.”

“그러하옵니다. 태자께서 조나라에 볼모로 가 있을 때 사귀신 분을 태자비로 모심은 온당치 않사옵니다. 태자비는 마땅히 진나라에서 구하심이 옳으실 줄 아뢰옵니다.”

대신들은 하나같이 조희의 태자비 옹립을 반대하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여불위는 자초를 찾아가 지난날의 약속을 환기시켰다. 그리고 태자 영정의 인물됨을 상기시키며 그를 후계자로 삼아야 한다고 진언했다.

“태자 마마. 조강지처를 버려서는 아니 되옵나이다. 그 어려웠던 시절을 상기하시어 조나라에 있는 그들을 진나라로 모셔 들이옵소서.”

여불위는 매일 같이 간청을 거듭했다. 자초 태자는 여불위의 조언이 귀찮기도 했지만 자신에게 오늘이 있도록 한 사람이 그였으므로 마다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그들을 불러들인다는 것은 대단한 부담이었다. 조희가 여불위의 애첩이었다는 소문이 함양궁에 퍼져있었으므로 그것을 한순간에 잠재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자초는 그것을 핑계로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성내에 부질없는 소문이 잠잠해지면 그때 부르자는 것이 자초의 말이었다. 게다가 조정 중신들의 반대도 하나의 핑곗거리였다.

“대인 조금만 시간을 두고 때를 기다립시다. 지금은 때가 아닌 듯합니다. 항간에 나와 관련된 소문이 너무나 좋지 않습니다. 이때 그들을 불러들여 기름을 붓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봅니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소문이 잦아들 것이고 그런 연후에 그들을 불러들여 태자비로 삼겠소이다.”

여불위의 간청에 태자는 때를 구실 삼았다.

또 그렇게 한 해가 저물었다. 조희는 속 타는 심정으로 마냥 진나라 조정에서 전갈이 오기만을 눈이 빠지도록 기다렸다. 하지만 그 소식은 어디에도 날아들지 않았다. 속이 타고 살이 탔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기다려온 세월이 억울했다. 들리는 소문에는 자초가 태자에 오른 뒤 새로운 궁녀들과의 사이에서 자식이 태어났다는 말도 들렸다. 하지만 그것들은 믿고 싶지 않았다. 그것을 믿게 된다면 자신과 아들 영정은 끈이 떨어진 연과 같은 처지이기에 애써 외면했다.

그러는 사이 오랜 기간 지병을 앓아온 효문왕이 자리에 누워있다 정식으로 왕위에 오른 지 3일 만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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