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초, 장양왕이 되다⑧

태풍이 지나고 나면 고요가 찾아오는 것이 이치였다. 궁내에 피바람이 한차례 불고난 뒤 술렁이든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모든 것이 조용했다.

조용하다는 것은 변화가 없는 것이다. 평화이기도 하지만 따분함이기도 했다. 봄날의 햇살처럼 따사로움만 정원에 가득 고였다. 몸이 스멀거렸다.

왕후의 자리를 지키고 있던 조희도 다를 것이 없었다.

그녀는 9년의 세월동안 영정만을 바라보며 조나라에서 어려움을 감내했건만 진나라로 왔을 때 그를 맞은 것은 왕후란 허울 좋은 이름뿐이었다. 자초는 왕의 신분이었으므로 숱한 궁녀들과 어울리며 왕후인 조희를 찾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게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어린 궁녀들과 비빈들을 가까이하느라 왕후궁에는 발길조차 주지 않았다. 늘 외로움만 사무쳤다.

생각이 여기에 머물자 승상 여불위를 불렀다. 승상이 왕후궁에 드나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바깥공기가 예전 같지 않사옵니다. 왕후 마마.”

여불위가 말했다.

“승상께서 바깥공기가 좋지 않다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입니까?”

왕후가 조급한 듯이 물었다.

“왕후께서는 염려 마시옵소서. 소신에게 생각이 있사옵니다.”

“승상만을 믿겠습니다.”

말끝에 왕후 조희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한숨을 쉬시옵니까?”

왕후는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여불위를 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외로워서 못살겠습니다. 지난날 이 몸이 승상의 애첩이었을 때는 밤이 이렇게 긴 줄 몰랐는데….”

왕후가 옷소매로 눈시울을 훔치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애처롭기 그지없었다. 황금빛 비단으로 휘감은 몸에, 곱게 화장을 하고 높은 보료에 앉아 있었지만 그녀는 밤을 그리워하는 여인이었다.

좁은 어깨를 떨며 울고 있는 여인의 모습을 보자 여불위의 마음이 달아올랐다. 지난날 자신의 품속에서 하루를 거르지 않았던 그녀가 이제는 구중궁궐 한가운데서 외로운 밤을 혼자 지새운다고 짐작하니 가슴이 미여졌다.

특히나 조희는 남자를 유독 그리워하는 여인이 아니던가. 한시라도 눈을 팔면 건장한 사내에게 곁눈질을 하던 그녀였는데….

승상 여불위는 주변을 둘러본 다음 왕후에게 다가 앉으며 그녀를 덥석 안았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는 갈등이 이글거렸다. 자신이 한 행위 자체를 거부하고 있었다. 승상의 위치에서 왕후를 안는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얘기였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얼굴이 화끈거리며 달아올랐다. 등에서 뜨거운 기운이 솟았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여불위는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차마 승상의 신분으로 왕후를 안을 수야 없겠지만 지아비로서 애첩을 품는 것이 무엇이 문제인가 하고 자위했다.

왕후는 기다렸다는 듯이 여불위의 넓은 가슴에 안기며 더욱 애처로이 울음을 토했다. 여불위는 울음 너머로 팔딱거리는 여인의 뜨거운 맥동소리를 듣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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