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을 맞다⑤

그들은 하나같이 억울하다며 살려줄 것을 애원했다. 무릎을 꿇고 잘못을 빌며 질질 끌려가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일부 중신들은 꼿꼿하게 걸어가며 진왕의 정책을 고래고래 비판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예외 없이 중문 밖에서 몸이 반으로 찢어지는 거열형에 처해지거나 철퇴를 맞았다.

거개의 중신들은 여불위의 잔당으로 몰려 목이 베이거나 내몰렸다. 진왕은 그동안 눈 밖에 났던 이들을 일거에 청소하는 계기로 삼았다. 노애가 그것을 도와준 것이다.

또 궁녀 가운데도 여불위가 들여보낸 여인들이 많았으므로 이들 역시 단호하게 내쳤다. 물론 아끼는 궁녀도 있었지만 그것을 지켜주는 것이 능사는 아니었다. 그들은 맞을 작정을 하면 얼마든지 맞을 수 있는 것이기에 새 부대를 만들 생각이었다.

많은 궁녀들이 병사들을 피해 도망갔지만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죽음뿐이었다. 궁내 곳곳이 피로 얼룩졌다. 궁녀들의 아우성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진왕은 노애사건을 계기로 여불위를 몰아내는 것은 물론 그의 잔당들을 모두 제거할 생각이었다. 약간이라도 여불위의 때가 묻은 족속은 거부하고 싶었다. 대청소는 할 때 해야 하는 법이다. 물들어 올 때 배질도 하라고 했질 않던가.

이 사건으로 위위갈, 내사사, 중대부 영제 등 20여 명의 중신들이 말에 묶여 사지가 찢기는 거열형에 처해져 시신이 저잣거리에 내걸렸다. 또 그들의 일가들은 모두 재산을 몰수당하고 참수형에 처해졌다.

여불위의 수하에 있으면서 관직에 있던 자들은 모두 삭탈관직당하고 변방으로 유배됐다.

죄가 가볍다고 판단되는 자들은 3년 동안 종묘에 땔감을 제공하는 귀신형에 처해져 고초를 겪었다. 이로 인해 4천여 가구가 함양을 떠나 귀양을 가거나 죄인으로 전락했다.

피바람이 한동안 함양궁을 들끓게 한 뒤 바람이 잔 새벽처럼 조용해졌다.

사실 진왕은 노애 사건을 계기로 여불위를 참수할 심산이었다.

한 부엌살림을 두 사람의 아녀자가 함께할 수 없듯이 그와는 동행하기 힘들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또 그를 살려 놓는다면 불씨를 남겨두는 꼴이 될 수 있어 그를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너무나 큰 원죄가 숨어있었다.

진왕에게 자신의 친부가 여불위란 사실을 알려주는 이는 없었지만 짐작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은 것은 선친 장양왕의 정통성을 잇고 있는 처지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고민이 깔려있어 진왕은 여불위를 참수치 않았다. 게다가 빈객과 책사들의 건의도 한몫을 했다.

“대왕마마. 죄인 여불위는 한때 승상의 위치에서 많은 공을 세웠으며 중부로 불렸던 만큼 그를 죽이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사려되옵나이다. 부디 하해와 같은 성은을 베푸시어 그를 귀양 보내도록 하시옵소서.”

책사들은 한결같이 청했다.

저작권자 © 금강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