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애를 맞다(18)

하지만 진왕은 스스로 따른 술잔을 기울이는 것 외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녀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소녀 연화라 하옵나이다. 성은을 입어 오늘에야 대왕마마를 모시게 되었사오니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진왕은 반응이 없었다.

“소녀 다시 아뢰옵나이다. 미천한 몸으로 하해와 같은 성은을 입어 대왕마마를 모시려 했으나 물리치시니 용안을 본 것만으로도 모신 것과 진배가 없사옵나이다. 다시 한 번 성은에 감사하며 만수무강을 비옵나이다.”

연화는 스스로 자리를 물리며 뒷걸음을 쳤다.

“네가 누구관데 감히 과인의 명도 없이 방을 나서려 하느냐?”

진왕이 술잔을 놓지도 않고 말했다. 시선은 여전히 술잔에 가 있었다.

“소녀 연화라고 이미 여쭈었사옵나이다. 그럼에도 대왕마마께옵서 눈길 한번 주시지 않으시기에 물러나려 했던 것이옵나이다.”

“그래서 어쩌자는 것이냐?”

진왕은 꼬박꼬박 말대꾸를 하는 계집이 기특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방자해 보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흥미로운 것은 자신의 앞에서 말대답을 한다는 사실이었다.

“대왕마마. 소녀가 어찌 마마의 명도 없이 이방을 나서겠나이까. 다만 보기가 역겹다 하시니 자리를 뒤로 물렸을 뿐이옵나이다.”

“과인이 언제 보기가 역겹다 했는가?”

“눈길 한번 주시지 않으심이 역겹다는 말씀이 아니겠나이까? 그럼 대왕마마를 가까이 모셔도 되시겠다는 말씀이오니까?”

맹랑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제야 진왕은 눈을 들어 연화를 내려다보았다. 총명한 눈빛과 고운 맵시가 밉지 않았다. 양 볼에는 볼그닥닥 옅게 화장을 했고 머리는 단출하게 올려 묶었다. 그 모습이 제비꽃처럼 단아했다.

“그래 가까이 와서 술을 따라 보아라.”

진왕은 그동안 여색을 멀리했던 터라 오랜만에 분내를 맡아보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다른 한편으로 보면 여불위가 죽은 것은 역사적 과업을 위해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었다. 아울러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정치적 부담을 덜게 된 것이었다.

진왕도 여불위가 생부이기 때문에 자신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믿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그렇다고 그런 의중을 누구에게도 발설할 수는 없었다.

진왕은 가까이 다가와 진한 향기를 풍기는 연화를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볼수록 아름다웠다.

“눈을 들어 보아라.”

연화는 아주 천천히 눈을 들었다. 진왕은 그녀의 눈 속을 들여다보았다. 호수처럼 맑은 그녀의 눈 속에 자신이 녹아 있었다. 손톱만 한 크기로 앙증맞게 보이는 자신의 눈부처가 유난히 보잘것없이 보였다. 그러면서도 한없이 깊이 빨려 들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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