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희의 진시황과 女> <79>
  • 금강일보
  • 승인 2016.06.21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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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애를 맞다(21)

“대왕마마. 죄인 여불위가 죽은 뒤에 그를 흠모하는 빈객과 문객들이 하루에도 수천씩이나 조의를 표하고 있다 하나이다.”

“무어라? 조문객이 하루에 수천에 달해? 그래 그자들이 어떤 자들이라고 하던가?”

“문객 가운데는 이 나라 고관대작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6국에서 몰려든 문객들이라 하옵나이다. 그들은 죄인을 흠모하는 시를 짓고 밤을 새워 경배하며 슬퍼하고 있다 하옵나이다.”

“무어라. 죽은 죄인을 흠모하여 시를 짓고 밤을 새워 경배를 한단 말이냐. 이는 과인을 욕되게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더냐.”

진왕은 격노하며 명을 내렸다.

“진나라에서 벼슬을 하는 이들 가운데 직위 고하를 막론하고 6국에서 온 자들은 모두 이 나라를 떠나게 하여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중벌을 받을 것이로다.”

진왕의 분노는 여기에 머물지 않았다. 여불위의 장례식에 참석한 이들 가운데 진나라 사람으로 녹봉이 600석 이상인 이들의 관직을 모두 삭탈하고 유배를 보냈다. 또 500석 이하의 관료들은 모두 변방으로 인사조치 했다.

이는 진왕의 분노가 아니라 계략이었다. 그는 그때까지 여불위의 잔당이 조당에 남아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 때문에 그들을 무엇으로 밝혀낼 것인가를 고민했다. 그러던 와중에 여불위의 상이 빚어졌고 문상을 계기로 적과 아군을 구분 짓게 되었던 것이다.

진왕은 이로써 여불위와 관련된 모든 이들을 내치고 정국을 완전히 평정했다.

여불위와 태후가 가졌던 모든 권한을 회수하여 철저한 친정체제에 돌입했다. 알지 못하던 사이 그들과 내통했던 이들을 밝혀내 물리고 새로운 인재를 대거 중용했다.

진왕 영정은 이 일이 있기 전까지는 인재등용에 남다른 심혈을 기울였으며 탁월한 면모를 보였다.

그는 특히 진나라뿐만 아니라 어느 나라의 누구라도 통일제국 건설을 위해 조언해주는 사람이면 옆에 두고 예우를 다했다. 이들을 객경이라고 불렀다.

이때 진왕이 객경으로 모신 사람은 왕전이나 그의 아들 왕분 그리고 위료, 요가, 돈약 등이 있었다. 이들은 물론 진나라 사람이 아니었지만 진나라의 통일을 위해 온힘을 다한 사람들이었다.

한번은 진왕이 위료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는 위나라 대량사람으로 군사적인 지략에 매우 밝았다. 그를 만나는 자리에서 진왕은 예를 갖추고 그를 극진히 대접했다. 그리고 그의 책략을 그대로 받아들여 군사정책에 활용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진왕이 다른 객경을 가까이하며 위료와의 만남을 소홀히 했다. 그것은 의도적인 것이 아니었으며 공사가 다망하여 빚어진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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