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상당구 문의면 소전리 벌랏한지마을, 대청호오백리길 16구간

오지마을의 대명사, 동막골. 그 동막골이 충북 청주에도 있다. 전쟁이 났어도 몰랐다는 이곳, 샘봉산 골짜기에 살포시 내려앉은 이 마을은 바로 벌랏한지마을이다. 출처는 명확하지 않지만 전국 8대 오지에 속한 마을이었단다. 벌랏마을은 이름처럼 내력 또한 특이하다. 임진왜란 때 피난 와 정착한 사람들이 산기슭을 일궈 만든 마을이다. 그래서 논은 거의 없고 밭이 많다. 거친 땅을 일궈 고단하게 삶을 살아냈던 사람들의 힘겨움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 화전민이 일군 한지마을

벌랏마을에서 민박을 운영하는 김성덕(76) 할머니는 스물셋 꽃다운 나이에 전라도 고흥에서 시집왔다. ‘충청도 양반’이란 말만 믿고 선뜻 선 자리에 나가 결혼했고, 벌랏마을의 주민이 됐다.

 

“여기는 대전에서 배를 타야만 들어올 수 있었어. 배 타고 강 건너 이 마을에 왔더니 순전 보리랑 닥나무더라구. 이맘 때쯤이네. 보리 거둬 타작해서 저 건너 강가에서 말리고 겨우내 닥나무 껍질 벗겨 끓이고 삶고 두들겨서 한지 만들고 그랬지. 어떻게 살았는지 다 말하려면 한도 끝도 없어. 한지 팔러 험한 장고개 넘어 보은까지 가기도 했다니까.”

 

할머니는 이렇게 해서 3남 1녀를 키웠다. 못 배운 게 한(恨)이라 아이들은 모두 대전으로 보내 교육을 시켰다. 문의에 있는 학교에 가려면 강을 거슬러 산을 타고 20리도 넘는 길을 걸어가야 하는데 이렇게 해선 공부를 못 시킬 것 같아 큰 결심을 했단다. 할머니의 시어머니가 아이들을 뒷바라지하기도 하고 할머니가 대전에 있는 식당(지금은 사라진 장미뷔페)에서 일하며 그렇게 자식들 공부를 시켰다.

 

“한 20년 같이 살았나? 남편하고 사별하고 나니까 자식에 시어머니까지 건사하느라 너무 힘들었어. 한지는 대전으로 못 팔러가. 그때만 해도 대전에선 창호지 바르는 집이 거의 없었지. 고개고개 넘어 시골로 들어가야 창호지 바르는 집을 찾았지. 그 고생은 말로 다 못해. 그래도 그렇게라도 돈을 버니까 크게 궁핍하진 않았어. 소 한 마리 안 키우는 집이 없었다니까. 여기가 왜 소전리인 줄 알아? 소가 많아서 그래(웃음).”

대청호가 조성되기 전, 벌랏마을의 생활권은 대전이었다. 산골짜기에서 내려와 배를 타고 어부동으로 건너갔다. 애들 학교도 그래서 대전으로 보냈다.

그러나 대청댐이 완공되고 이곳에 물이 차면서 뱃길이 끊겼다. 구불구불 산을 깎아 신작로가 나면서 생활권이 청주로 바뀌었다. 논·밭이 물에 잠기면서 많은 주민이 떠났다. 이 마을 한지가 명성을 날리던 시절, 마을주민은 오백 명이 넘었지만 지금은 스물두 가구, 서른네 명이 남아 있다. 70세 이상 어르신들이 대부분이다.

현재 이 마을의 주 수입원은 체험마을 운영이다. 할머니들은 체험 온 사람들 밥 해주고 할아버지들은 체험 프로그램 도와주며 소일한다. 김성덕 할머니를 포함해 대여섯 가구는 민박도 한다. 마을 이장님께 신청하면 순번대로 돌아가면서 민박집을 배정한다. 4만 원을 받는데 3만 6000원은 민박집 몫이고 나머지는 마을 기금으로 적립된다.

이 마을(소전1구)엔 그 흔한 구멍가게 하나 없다. 고개 넘어 소전2구에도 없다. 온갖 잡다한 물건을 싣고 일주일에 한 번, 그것도 오고 싶은 날 오는 ‘이동 슈퍼마켓’이 당도해야 필요한 걸 산다. 버스는 하루에 7번 다닌다. 청주와 청원이 통합되면서 한 번 더 늘었다.

 

 #. 웰컴 투 '청주 동막골'

벌랏한지마을(홈페이지 http://bulat.cheongju.go.kr)은 보은 회남에서 산을 넘어 벌랏나루터로 들어와서 마을 뒤 임도를 통해 소전2구로 빠져나가는 대청호오백리길 16구간에서 만날 수 있다. 지도를 봐도 그렇고 실제 길을 걸어 봐도 새삼 드는 생각은 ‘어떻게 이런 곳에 마을이…’라는 건데 어쨌든 이 마을은 500년 넘게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오랜 일기장에서 우연찮게 발견할 법한 옛 추억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매력적인 곳이다.

대전에서 출발해 신탄진을 거쳐 대청호반길을 타고 문의 쪽으로 향한다. 노란색 중앙선이 있는 도로(509번 도로)를 타고 청남대 뒷길(보은 회남방면)로 달리다 우측으로 작은 다리 하나를 건넌다. 좁은 길을 타고 가다 보면 소전보건진료소를 만나고 다시 임도를 타고 산 하나를 넘으면 벌랏마을에 당도한다.

마을 이장님은 하루 묵을 곳으로 ‘다무락집’을 정해주셨다. 김성덕 할머니의 집이다. 그동안 많은 이들이 다녀간 터라 손님 접대가 꽤나 능숙하다. 어린 시절 방학 때 외갓집에 가곤 했는데 거기서 느꼈던, 말로 설명하기 힘든 뭔지 모를 것들이 새록새록 오감으로 되살아나 감성을 깨운다.

짐 정리를 하고 마을의 숨은 이야기를 찾아 마실 나선다. 워낙 좁은 터에 자리 잡은 마을이라 집들이 담을 맞대고 옹기종기 모여 있다. 마을 구석구석 개울이 흘러 귀가 시원하다. 마을의 중심, 우물가 느티나무 아래, 마을 지도판에서 마실을 시작한다. 이 동네의 유일한 네거리다. 모든 길이 여기로 통한다.

 

대나무로 뼈대를 세우고 흙을 채워 만든 담배건조장이 인상적이다. 군데군데 눈길을 끄는 벽화들도 신선하다. 이 벽화는 2012년 6월 한림디자인고 학생들이 남긴 재능기부의 흔적이다. ‘철수 할아버지댁’의 이층집도 이채롭다. 요즘은 시골에서도 보기 힘든 가옥 형태인데 살짝 일제시대의 흔적이 엿보인다.

남쪽으로 길을 잡자 이 마을의 상징인 벌랏나루터가 눈에 들어온다. 산골짜기에 나루터라니. 마을 뒷산으로 길이 나기 전까지 이 마을의 유일한 출입문이 바로 이곳이다. 이 나루터는 대청호가 조성된 뒤 한동안 사용됐다. 원래 나루터는 한참 더 먼 곳에 있었다. 여기는 나루터로 가는 길목이었다. 골짜기까지 물이 차오르면서 이곳에 나루터가 생긴 거다.

이곳에서 보이는 건 병풍처럼 둘러싼 산과 하늘뿐이다. 하늘과 산과 호수가 한 곳에서 만나는 지점에 시선이 멈춘다. 넋을 놓고 그곳을 응시하고 있으면 어느 순간 배가 들어올 것만 같은 착각이 머릿속을 지배한다. 시간도 멈춘 듯한 고요함은 우리에게 잠시 ‘멍 때릴’ 기회를 준다. 아무 생각 없이 텅 빈 뇌의 상태가 이런 것일까. 나도 곧바로 그 고요함의 일부가 된다. ‘이 얼마 만에 느끼는 마음의 평정인가.’

 

 

대청호의 숨겨진 속살이 아무리 좋아도 샘봉산 자락 벌랏마을에서 광활한 대청호의 비경을 놓칠 수 없다. 이장님의 도움으로 샘봉산에 오르기로 한다.

안타깝게도 이 마을엔 샘봉산에 오르는 공식 등산로가 없다. 수풀이 우거져 길을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샘봉산 정상은 약 450m. 한 시간 정도면 오를 수 있지만 길인 듯 아닌 듯 헷갈리는 지점들이 많아 초입 부분에선 많은 시행착오가 불가피하다.

중턱쯤 오르면서 대청호가 우거진 나무 사이로 눈에 들어온다. 산 정상에서의 입이 떡 벌어지는 풍광을 기대하며 힘을 낸다. 그런데 탁 트인 시야를 찾아 이곳저곳 발을 딛어 보지만 마땅한 곳이 없다. 잘 자란 나무들이 야속하기만 하다.

‘샘봉산 461.7m’ 정상에 도착하고야 말았지만 여전히 시야는 여지없이 나무에 가로막힌다.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아쉬움은 천 배고 발걸음은 천근만근이다. 하산하는 길, 깊은 산골짜기에 파묻힌 벌랏마을의 모습만 눈에 담는다.

 

#. 오지의 밤은 아름답다

역시 산행 뒤 밥맛은 꿀맛이다. 저녁반찬이 부실할 것 같아 안절부절인 할머니가 된장찌개와 특제소스로 버무린 나물무침을 내주셨다. 미나리와 뽕잎 등 여덟 가지 나물이 한데 모인 새콤달콤한 나물무침 한 젓가락에 피곤함이 싹 가신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나물무침의 비밀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김성덕 할머니만의 비법이 담긴 식초에 있단다. 맛있게 밥 두 공기를 뚝딱 해치웠다. 대신 두둑해진 배를 주체하지 못해 다시 마실을 나서야 하는 부작용(?)이 뒤따른다.

마을에 어둠이 내리자 하늘에선 별빛이 불을 밝힌다. 그런데 이건 많아도 너무 많다. 하늘에 별이 이렇게나 많았나? 새삼 눈을 의심해보기 충분할 정도로 별들이 머리 위로 쏟아진다.

그냥 길바닥에 철퍼덕 자리 깔고 누워 별들의 향연을 감상한다. 모기들만 귀찮게 하지 않으면 그냥 스르륵 잠들고 싶을 정도다. 낯선 이방인의 방문을 눈치챈 동네 개들도 간만에 제 할 일을 하느라 바쁘다. 짓는 소리가 얼마나 큰지 ‘별 감상의 호사’는 이것으로 마무리한다.

김성덕 할머니의 민박집은 수백 년을 견뎌온 돌담장과 담장을 타고 기어오르는 넝쿨 콩이 인상적인데 마당에 유리온실이 있는 게 특이하다. 할머니는 꽃 키우는 걸 좋아하는데 그래서 겨울에도 꽃 많이 보시라고 아들네가 지어줬다고 한다.

이 유리온실은 그러나 온실 그 이상의 기능을 탑재하고 있다. 온실 안에 누우니 또다시 별빛이 내린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다시 한번 별 감상의 호사를 제대로 누린다. 모기향의 길이는 점점 짧아지고 그렇게 벌랏마을의 밤은 깊어간다. 이슬이 내린다. 내일은 맑을 모양이다.

#. 샘봉산의 아쉬움을 달래려

7월 9일 토요일 아침 7시, 선풍기의 도움 없이도 충분히 시원한 잠자리 덕에 개운하게 아침을 맞이한다. 햇살이 얼마나 강한지 아침나절부터 푹푹 찌기 시작한다. 이날 오후 1시에 벌랏마을에서 꼭 해봐야 할 한지 만들기 체험 일정이 잡혀있다기에 오전에 간단한 산행을 하기로 했다.

전날 샘봉산에서의 아쉬움을 달래보기 위함이다. 벌랏마을을 감싸고 있는 샘봉산 날개 줄기를 타고 대청호에 다가서는 루트다. 이곳 역시 공식 등산로가 아니어서 길이 험하다.

김필수 이장의 간단한 설명을 듣고 오지 탐험에 나선다. 오랜 기간 사람의 발길이 끊긴 터라 길이 이어지다 끊기길 반복한다. 가시나무를 포함해 우거진 수풀이 살갗에 상처를 낸다. 준비 부족에 대한 대가다. 정신없이 발길을 재촉해 산줄기 끝 낭떠러지에 멈췄다.

광활한 대청호가 시원스럽게 펼쳐진다. 곧게 자란 나무들이 시야를 가리지만 나무 사이로 대청호를 훔쳐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물론 또 한 번 아쉬움은 크게 다가온다. 김 이장님이 이곳을 소개한 이유를 알 것 같다. 마을 사람들이 느끼는 아쉬움을 실제 느껴보라는 취지였으리라.

벌랏마을은 농촌체험마을, 팜스테이 등 대략 4가지 농촌체험관광 브랜드를 보유하고 있는데 마을 체험객 유인력이 점점 떨어지고 있어 새로운 매력 요소가 필요하다. 두말할 나위 없이 벌랏마을의 희망은 대청호의 풍경이다. 그래서 샘봉산 등산로 개설을 관계기관에 수없이 건의했지만 번번이 ‘불허’됐다. 마을 주민들은 환경오염·훼손이 없도록 스스로 잘 관리하면 크게 문제될 게 없다고 생각하는데 행정당국의 입장은 다른 모양이다. 마을 주민들의 애타는 심정을 누가 알아줄까.

벌써 해가 중천이다. 관광버스 한 대가 좁은 임도를 타고 마을로 들어온다. 체험 예약을 한 청주 오창고 학생들이다. 진로체험교육의 목적으로 이곳을 찾았단다. 교육은 이장을 비롯해 마을주민 3명이 맡았다.

능숙한 솜씨로 곱게 갈린 닥나무 섬유질(내피)을 발로 떠 얇게 떠낸 뒤 말려 한지 한 장을 만들어낸다. 한지를 만드는 과정은 간단하지만 준비과정은 그리 간단치 않다. 닥나무를 삶아 껍질을 벗긴 뒤 말리고 다시 외피에서 내피를 벗겨내 또 삶는다. 묽어진 내피를 방망이로 두드린다. 곱게 갈린 내피를 씻는다. 표백 효과를 위해 양잿물을 썼다. 이 과정을 거쳐야 한지 만들기를 시작할 수 있다.

오창고 학생들은 이곳에서 직접 공책 크기 만한 한지 한 장씩 만들었다. 이 한지로 작품을 만들어 전시회를 열 예정이란다.

아이들이 떠나고 시끌벅적했던 마을에 다시 평온이 찾아왔다. 아이들 밥을 챙겨준 아주머니들과 체험을 도와준 아저씨들도 서로 등 토닥여 주며 그렇게 또 하루 체험행사를 마친다.

이제 우리도 헤어져야 할 시간. 방 정리를 하고 다무락집 대문을 나선다. 할머니는 손을 흔들어 기약 없는 다음을 기약한다. 이기준 기자 lkj@ggilbo.com

ㄴ벌랏한지마을 마실 뒷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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