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하, 누가 들을까 두려워 조용히 말씀 드려도 되겠나이까?""허허, 거참 누가 듣는단 말이냐. 그럼 조용히 내 귀에 일러 보거라." 내관은 취기가 풍기는 왕 가까이로 기어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그러자 영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눈을 부릅떴다. "지금 한 말이 사실이렷다.""누구의 안전이라고 감히 거짓을 고하겠나이까?"진왕 영정은 즉시 대전 앞을 지키고 있던 호위대장을 불러들였다. 호위대장은 언제 어느 때 자신을 위해하기 위해 자객이 숨어들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심어 놓은 심복이었다. 그에게 정예의 호위사병을 대기시키라고 이른 다음 곧바로 자신의 긴 칼을 뽑아들었다. 시퍼런 칼날이 등잔불에 빛났다."내 직접 확인해 보리라."영정은 대전의 문을 박차고 나가 문 밖에 대기시켜 놓은 말 위에 올라앉았다.그리고는 곧바로 말을 달렸다. 그의 뒤에는 호위대장과 병사들이 말을 타고 따랐다.그는 침전으로 향하는 듯하다 이내 태후궁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안장 위에 앉은 진왕의 거친 숨소리와 맥동이 뒤따르는 호위병들의 귀에도 들려왔다. 수염이 휘날렸고 옷자락이 날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말을 모는 손끝에는 노기가 가득 차 있었다. 한밤에 말발굽소리가 궁내에 요란하게 울렸다. 누구도 갑작스런 왕의 행차라 말릴 수 없었다. 모두들 무슨 변고가 날 것이라는 짐작만 할 뿐 어떤 일이 벌어질지에 대해서는 예측할 수도 예측되지도 않았다. 모두들 손에 땀을 쥐고 숨을 죽이며 뒤를 따랐다.태후궁으로 향하는 진왕의 머릿속에는 잡스러운 풍경들이 스쳐 지났다. 그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풍경이었다. 생각이 여기에 머물자 눈에 핏발이 솟아올랐다. 불기운이 눈으로 쏟아지는 것 같았다. 거친 숨을 다시 내몰았다."괘씸한 것들…."진왕은 혼자 말을 하며 더욱 다급히 말을 몰았다.그러면서도 한편으로 그럴 리야 있겠느냐고 내관을 의심하고 있었다. 내관이 자신에게 거짓을 고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내관의 목을 당장 날려 버리겠노라고 다짐했다. '아니야. 이것은 절호의 기회다. 이번 참에 모든 것을 바로잡아야 한다. 그동안 겪어 온 모든 것들을 일순간에 날려 버릴 수 있는 기회다.'진왕은 속으로 되뇌였다. 오늘 따라 태후궁이 유난히 멀게 느껴졌다.진왕은 한동안 태후궁을 찾지 않았다. 물론 어린시절에는 매일 그곳을 찾아 문안을 여쭈었지만 머리가 굵어지면서 그것도 뒤로했다. 더욱이 태후가 중부 여불위와 함께 국정을 농단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부터 그곳을 찾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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