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공민왕 때 양광도서 충청도로 개칭><개칭 당시엔 경기·강원·충청지역 포괄> <조선시대엔 '충흥도·공청도'로 불려>

반만년 역사를 가진 우리 역대 왕조의 흥망성쇠는 매우 다양하지만, 지방행정구역의 개편은 그보다 몇 곱절 다양하다.우리 역사에서 지금과 같은 일선 행정조직이 정비된 것은 고려 때로 보고 있는데,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는 아직 지방호족 세력을 장악하지 못한 과도기적 조치로 성종 2년(983) 호족과 연합해 전국 주요도시를 거점으로 하는 12목(해주· 황주· 광주· 양주· 충주· 청주· 공주· 전주· 나주· 승주· 진주· 상주)제를 취했는데, 지방에 관리를 파견할 때에도 그를 믿지 못해서 단신 부임을 원칙으로 하다가 왕 5년(986)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가족을 동행하도록 했다.12목을 설치할 당시 지금의 충청지방에는 충주? 청주? 공주 등 3목이 설치되었는데, 993년 거란과 1차전쟁을 겪은 직후인 성종 14년(995) 12목을 10도로 개편한 것은 전쟁을 치르면서 중앙집권제가 강화되었음을 말해준다.종래 12목이 있던 주에는 당 현종 때 안사의 난(安史의亂 : 안녹산과 사사명의 반란)이후 군사체제로 성격이 강한 절도사를 두었으나, 중앙관리는 현까지만 파견했다. 또, 나말 이래 유지해오던 군(郡)을 없애고 주?현제를 시행했는데,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주현(主縣)과 속현(屬縣)제도이다. 이것은 중앙에서 모든 지방기관에 관리를 파견하지 않고, 규모가 작거나 관리를 파견할 만큼의 실익이 적은 현은 인근의 큰 현에서 겸임하도록 한 것이 주현인데, 개편당시 주현 129개, 속현은 361개이었다는 통계가 있다. 속현은 향호(鄕豪=戶長)가 관리했는데, 그 배경은 아마도 아직 말단까지 중앙통제가 미치지 못해서 지역의 호족을 지방관으로 편입하는 과도기 현상이 아니었을까 싶다. 현종 3년(1012) 절도사제를 폐지하고 전국을 5도호부, 75도의 안무사 제도로, 현종 9년(1018)에는 다시 전국을 5도 양계체제로 개편했는데, 이때 지금의 충청도인 하남도 일대는 양주와 광주를 중심 목으로 한 양광도(楊廣道= 관내도·河南道?中原道를 통합)로 흡수되고 말았다.즉, 양광도는 종래 관내도(고려의 서울인 개경을 둘러싼 지금의 경기· 황해도 지역), 중원도(충주를 중심으로 한 충북 일대), 하남도(공주를 중심으로 한 충남지방 일대)였다.어떻든 5도체제가 거의 1세기를 유지해오다가 예종 원년(1105)에 명칭을 양광충청주도(楊廣忠淸州道)로 다시 변경하는데, 명칭은 관내의 대도시 이름에서 따서 양광충청주도는 지금의 경기·충청남북도 지방인 양주(楊州)· 광주(廣州)· 충주(忠州)· 청주(淸州)의 4목을 의미한 것이었다.그 후 명종 원년(1171) 양광청주도는 양광주도(楊廣州道)와 충청주도(忠淸州道)로 나뉘더니, 충숙왕 원년(1313)에는 다시 1개 도로 합치면서 종전처럼 양광도라고 불렀으나, 이 무렵에 그 지역의 중심도시인 목 이름이 빠지고 도(道)로 간이화 된다.그런데, 당시 부?군?현의 편제는 면적이나 인구수의 많고 적음을 기준하지 않고, 왕비의 고향이거나 고관?명신 등의 출신지인 경우에 승격을 하고, 반대로 반역이나 강상의 죄 등을 저지른 주모자의 출신지는 격하시키거나 폐지하는 등 중세의 통치의도가 지배적이었다.아무튼 고려 말인 공민왕 5년(1356) 양광도는 충청도(忠淸道)로 개칭되면서 처음으로 지방조직으로서 충청도라는 지명이 나타나지만, 이때는 경기· 강원· 충청지역 일대를 포괄하는 지명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태조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하자마자 하루바삐 고려와 단절되기를 원했기 때문에 천도와 관제개혁이 급선무이어서 계룡산 신도읍 공사를 추진했으나, 1년 만에 한양으로 바꿔서 도읍공사를 하더니 태조 4년(1395)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지방행정구역을 일부 개편했다.이때 양광도를 양주와 광주목이 관할하던 지역을 경기라 하고, 공주목과 홍주목이 관할하던 지역을 충청도라고 했는데, 충청도 감영은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충주에 두었다.그 후 1.2차 왕자의 난을 거쳐서 왕권을 확립한 태종 13년(1413) 전국을 8도로 개편하여 ‘조선 8도’라는 이름이 한말까지 이어지는데, 8도(경기· 충청· 경상· 전라· 황해· 강원· 영안(함경)· 평안), 4부(경주· 전주· 영흥(함흥)· 평양), 4도호부(안동· 강릉· 안변· 영변) 체제였다.이때 종래 충청도 관할이던 여흥(여주)? 안성? 음죽? 양성? 양지 지역을 경기 관할로 하는 한편, 종래 경상도 관할이던 옥천? 영동? 보은? 황간을 충청도의 관할지역으로 하여 4목? 12군? 38현에 이르게 되었다. 최고지방관인 도절제사(道節制使)는 태종 9년(1409) 도(道)로 통일되면서 관찰사(또는 감사 : 종2품)로 단일화 되고, 지방행정구역은 대도호부(부사 : 정3품)→ 부(부윤 : 종2품)→ 목(정3품)→ 군(군수, 종4품)→ 현(현령, 종5품. 작은 현의 현감, 종6품) 등으로 나누고, 관찰사 아래 부윤(府尹 : 종2품)· 목· 군· 현의 장을 두었다.관찰사와 부사를 방백(方伯)이라 하고, 관찰사 아래 지방관을 총칭하여 수령이라 했는데, 수령 중에서 부윤은 관찰사와 동격으로서 관찰사가 겸직했다. 관찰사는 지방수령의 감찰이 주임무인 풍헌관(風憲官)이라는 점에서 중앙의 대사헌과 같은 직책이었으며, 중앙의 6조와 같이 이·호·예·병·형·공의 업무를 처리하는 6방(房을 두었다. 그 관리를 향리라 했는데, 그들은 수령이 집무하는 동헌 앞에 사무실이 있다 하여 ‘아전(衙前)’이라고도 불렀다.6방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이·호·형방을 ‘3공형(三公兄)’이라 했는데, 수령의 부재시에는 호방이 그 업무를 대리하였다. 수령의 기본 임무인 수령7사(守令七事)는 ①농상(農桑)의 장려 ②호구의 증대 ③교육의 진흥 ④군정의 수비 ⑤부역의 공평 ⑥송사(訟事)의 판결 ⑦향호의 감독이었는데, 그 중 호구는 곧 국가의 각종 부역과 조세를 부담할 대상자이었으므로 정(丁)의 조사에 가장 중점을 두었으며, 매3년마다 조사했다.호구조사에서는 주소·본인의 관직·성명·연령과 4부조까지의 이름이외에 처의 성씨와 연령, 솔거자녀의 연령·성명 그밖에 노비와 고공의 연령과 성명까지 기록하였다.조선에서도 대한제국까지 지방행정구역의 명칭과 관할이 자주 바뀌었는데, 그 원인은 정치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성리학적 입장에서 관내의 주·목인 계도관 지역에서 모반이나 강상의 죄를 범하는 등의 변이 일어나는 경우 그 군·현을 격하시키고, 그 명칭을 다른 지방의 명칭과 합쳐서 새로운 지명으로 삼는 형식이 주요이유였다. 충청도의 경우 진이 설치되었던 대도시인 계도관은 충주· 청주· 공주· 홍주로서 소속 관할 고을 이름의 머리글자를 삭제하여 다른 고을 이름의 머리글자를 붙이는 등의 방식을 취해 온 내역은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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