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겁게 불타오르다 장렬히 산화했다. 희뿌연 재가 산야를 뒤덮는다. 자연의 모습 그대로 역동적인 한 해를 보낸 대청호에도 이렇게 겨울이 찾아왔다. 속살을 드러낸 호반의 풍경은 봄의 신록, 여름의 초록, 가을의 단풍에 비할 바 못 되지만 다시 봄을 맞이하기 위해 에너지를 비축하는 생동감은 여전히 살아있다. 물은 흐르고 앙상한 나뭇가지에도 생명이 살아 숨 쉰다. 서리 내린 땅에도 온기는 남아 있다. 아슬아슬한 이 생명력은 한파를 이겨내고 또다시 싹을 틔우리라.

자연은 이제 황량함과 쓸쓸함, 허전함 따위가 주된 콘셉트다. 그래서 마음 한켠, 가슴을 따뜻하게 해줄 ‘추억거리’를 애써 찾아나서게 된다. 우리가 추억을 더듬는 건 비단 쓸쓸함이나 허전함을 달래기 위함만이 아니다. 답답한 현실, 여기서 받는 심신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의 분출이기도 하다. 같은 맥락에서 요즘 ‘컬러링북’이라는 아이템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어른들에겐 ‘낙서’라는 어린 시절 추억을 소환하는 묘한 매력이 있다고 한다. 또 자신만의 컬러로 밑그림에 색칠을 하는 데 몰입하면서 자연스럽게 명상을 하는 효과도 있단다. 어쨌든 지친 심신을 달래는 일은 현대인의 생활에서 반드시 필요한 일과가 됐다. 치료가 아닌 치유, 즉 ‘힐링(healing)’ 열풍과도 맞닿아 있다. 인문학의 관점에서 대자연의 존재가 더 소중해지고 지속가능성에 대한 가치가 새로운 시대 화두가 된 이유다.

 

#. 옛 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 - 이지당이 품은 이야기

가슴 훈훈해지는 옛이야기를 찾아 떠난 곳은 충북 옥천의 대청호반, 대청호 오백리길 8구간 선비길이다. 정지용의 ‘향수’를 읊조리며 어린 시절의 추억과 고향에 대한 향수를 더듬어 본다. 맑고 아늑한 농촌마을의 전형을 느끼기에도 좋지만 역사 속 인물에 얽힌 사연을 훑어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8구간의 포인트 가운데 하나인 이지당(二止堂)은 중봉 조헌(1544-1592) 선생의 발자취가 서려 있는 곳이다. 서화천(소옥천)과 어우러져 우리 전통 건축물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이지당은 조헌 선생이 지방의 영재를 모아 학문을 논의하던 서당이다. 지금의 서당 건너편 각신마을에 있어서 각신서당(覺新書堂)이라 했지만 뒤에 우암 송시열(1607-1689) 선생에 의해 이지당이란 이름을 얻었다. 시전(詩傳)에 나오는 ‘고산앙지 경행행지(高山仰止 景行行止, 산이 높으면 우러러보지 않을 수 없고 큰 행실은 그칠 수 없다’라는 문구의 끝, 두 개의 지(止)자를 땄다고 한다.

행동하는 양심, 올곧은 선비정신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조헌 선생은 경기도 김포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 옥천의 인물은 아니지만 이곳에서 우리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업적을 남겼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맞서 싸우면서 장렬히 산화했다. 옥천에서 거병한 조헌은 영규대사와 함께 청주성을 수복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조선관군의 시기와 방해로 의병은 흩어졌고 결국 남은 700여 명의 의병과 함께 한양으로 진격하는 왜군과 금산에서 일전을 치렀다. 물론 중과부적(衆寡不敵)이었지만 일본군의 진격을 늦추면서 관군에게 대비할 시간을 벌어줬다. 현재 금산 칠백의총(七百義塚)엔 조헌과 칠백의병의 넋이 고이 잠들어 있다.

조헌 선생의 일대기를 살펴보면 참 억울한 점이 많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충언으로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고 그렇게 상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되레 ‘미친놈’ 취급만 당했다. 임금의 엄포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하고 또 했다. 상소를 올릴 때 도끼를 함께 가져가거나 머리를 땅에 내리찍으면서 절실함을 토해냈다. 이게 바로 그 유명한 지부상소(持斧上疏)다. 상소를 가납하지 않으려면 차라리 도끼로 자신을 찍어 죽이라는 뜻이다. 그만큼 간절했다.

현재의 이지당은 1901년 인근 마을 금(琴)·이(李)·조(趙)·안(安) 네 문중이 팔작지붕으로 중건한 거다. 건물구조는 목조 기와집으로 정면 일곱 칸 측면 한 칸의 팔작집인데 가운데 세 칸은 대청(마루)이고 서편의 세 칸 중 두 칸은 방이며 한 칸은 부엌이다. 부엌 위로 두 칸의 누각이 있고 동편 한 칸 방 위에도 이층 두 칸의 누각을 만들어 여름에 사용하기 좋도록 했다.

이지당 앞으로 흐르는 서화천은 예나 지금이나 세차게 흐른다. 바위에 부딪히는 물소리가 맑고 경쾌하다. 이지당 앞 다리 아래 널찍한 바위 하나가 있는데 마을사람들은 이를 ‘방바위’라고 불렀다. 강 위에 떠 있는 바위에 걸터앉으면 풍류가 절로 나오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서당에서 학문을 가르쳤던 조헌이 그랬고 훗날 조헌을 흠모한 송시열도 이 방바위에서 술 한 잔에 시조를 읊조리며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다리에서 이지당을 바라보며 물 흐르는 소리를 잠시 듣고 있으면 미래 동량과 함께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며 강직한 목소리로 글을 읽는 조헌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서화천과 이지당의 조화가 아름다운 또 다른 이유다.

 

#. 소금강, 기암괴석의 향연 : 부소담악 

선비길의 출발점인 부소담악(扶沼潭岳)은 이 구간의 하이라이트이기도 하지만 대청호 오백리길 전체를 대표하는 명소 중의 명소다. 호수 가운데를 깊숙이 파고드는 좁고 기다란 암봉의 행렬은 자연이 만들어낸 예술의 극치를 보여준다. 고리산(환산)에서 뻗어 나와 호수 사이로 자그마치 700여m나 이어지는 기암절벽은 호수 위에 펼쳐진 바위 병풍과도 같다. 소금강(小金剛)이란 수식어가 아깝지 않은 절경이다. 율곡 이이는 빼어난 산세를 작은 금강산이란 뜻에서 소금강이라 했는데 율곡의 학맥을 이은 우암 송시열은 부소담악을 보고 소금강이라 했다.

부소담악이란 이름이 이 마을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지금의 추소리는 추동과 부소무니 마을 이름에서 한 자씩 따온 것인데 이 부소무니마을의 험준한 바위라는 의미에서 부소담악이라 불린다. 지금은 대청호가 조성되면서 물이 차올라 암봉의 꼭대기 부분만 남았는데 예전에 작은 서화천이 흐를 때를 생각해보면 훨씬 장쾌한 모습이 아니었을까 머릿속에 그려진다. 송시열 선생이 ‘소금강’이라 했을 정도니 그 위세는 대단했을 법하다.

추소리 부소담악은 봄이 가장 아름답다. 진달래와 개나리, 산벚꽃이 형형색색 어우러진 마을 풍경이 무척 예쁘다. 마을에서 부소담악으로 진입하는 데크길을 걸으며 봄의 향기를 느껴보는 건 대단한 행운일 수 있다. 물론 겨울의 경치도 나름 운치가 있다. 나뭇가지가 앙상하지만 그래서 부소담악의 위용을 더욱 선명하게 눈에 담을 수 있다. 파란 하늘, 이 하늘빛을 고스란히 투영한 푸른 대청호 위에 우뚝 솟은 부소담악은 그 자체로 예술 작품이 된다.

 

데크길을 따라 장승공원에 도달하고 여기서 조금 산길을 오르면 부소담악의 능선을 따라 걸어 들어갈 수 있다. 그 시작점에 추소정이란 정자가 세워져 있다. 부소담악의 능선은 매우 좁다. 온통 바위들 뿐이어서 자칫 발을 헛디디면 낭패를 볼 수 있다. 걷는 내내 양 옆으로 푸른 대청호가 펼쳐지기 때문에 출렁다리를 걷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대청호가 아니라면 좁은 암벽 능선이 더 아찔하게 펼쳐졌을 거다. 지금은 부소담악 능선을 따라 약 150m 정도만 들어갈 수 있다. 암봉 가운데 가장 낮은 곳으로 물이 흐르기 때문이다. 예전엔 이 암봉 사이에 누군가 징검다리(나무막대기)를 놓아 위태롭지만 더 진입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이 나무막대기가 치워졌다.

아쉬운 마음은 부소담악 건너편 물가에서 달랠 수 있다. 마을에서 나와 도로를 따라 걷다 보면 널찍한 조망 포인트가 있다. 물론 부소담악의 한쪽 편만 볼 수 있다. 호수를 가로지르는 장쾌한 부소담악의 전경을 보려면 도로 뒤편 등산로를 따라 고리산에 올라야 한다.

 

중봉 조헌의 이지당과 송시열이 극찬한 부소담악이 전통의 명소라면 이지당 인근 소옥천생태습지는 최근의 힐링 명소다. 산책 코스로 안성맞춤이고 아이들 생태학습장으로도 좋은 시설이다. 대청호 물길이 잠시 쉬어가는 이곳은 수질정화의 기능을 한다. 3만 4500㎡에 이르는 넓은 들판에 소류지들이 조성돼 있다. 대청호 물길은 이 소류지들을 거치고 또 거치면서 깨끗한 물로 정화되고 다시 대청호 본류로 유입된다. 최근 습지 인근에 전망대가 새로 설치돼 습지 전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글·사진=이기준 기자 lkj@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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