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상숙 수필가

누가 가져다 놓았나, 할머니 댁 사랑방 개다리소반 위 사기대접에 놓여있던 홍시 하나. 석양 무렵, 서대전 육교를 걷노라면 어릴 적 남겨두었던 홍시가 제 그림자 밟고 서있는 빌딩 숲에 동그마니 앉아있다. 모닥불 사위어가듯 한낮의 광채도 사라진 해맑은 선홍의 얼굴이 점찍은 듯 또렷하여 청초한 느낌마저 든다. 활기차고 선동적인 빨강이 할 일 다 마친 충만함으로, 떠나야 하는 순간을 받아들이는 겸허함으로 차분하고 오롯하게 정좌하고 있다.

인생의 노년을 황혼에 비유하는 것은 목숨붙이들 따뜻하게 품어준 뒤에 군더더기 없는 유일의 마침표 하나로 깔끔하게 마무리하는 뒷모습을 닮고 싶은 바램이 담겼기 때문일 게다. 천지창조 이래 인류는 물론 모든 생물체는 태양의 도움을 받지 않은 것이 없다. 고대 사람들이 신앙의 대상으로 태양신을 숭배하였던 것도 그의 권능을 일찍이 알아보았기 때문일 터이다. 지구의 109배나 된다는 태양의 넓은 품이 고맙지 않은 적이 있으랴만 무심하였던 것은 눈만 뜨면 환한 얼굴로 세상을 밝히니 늘 당연하게 생각하였던 까닭이다. 황홀경은 아니더라도 품위가 있고 일몰 직전의 고즈넉한 분위기가 다시 못 볼 비경처럼 설레어 오늘은 발길 닿는 대로 걷는다.

퇴근을 서두르는 자동차의 행렬은 끝없이 이어지고 해는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어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면 기다린 손님처럼 적요가 찾아온다. 이 시간이면 식구들의 저녁밥상을 위해 뛰다시피 발걸음을 서둘렀으나 그것도 아이들 어릴 때의 조바심이었다. 바깥일로 눈코 뜰 새 없었을 때에는 서두르다 일을 그르치기 일쑤였고 휴일을 지내고나서도 피곤이 풀리지 않아 일주일만 온전히 쉬는 것이 소원인 날도 있었다. 이리 호젓한 날이 미구에 닥치리라 예상했어도 실감하진 못하였는데 적막이 호위하듯 사방에서 에워싸자, 지금까지 익숙하던 내가 아니라 당황스럽고 당장 할 일이 없다고 느끼는 순간 정신이 아득해진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일터에서 소외된 허전함과 낯설음이 생경스러워 생업 이외의 즐기는 일을 찾는 것인지 모른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이 인간은 누구나 혼자다. 누구와 어울려 정담을 나누며 즐긴다 해도 일시적인 일이요, 돌아서면 다시 외로운 존재이기에 감정을 조율하면서 주어진 생을 어기차게 살아내야 한다. 의식주가 문제라면 말할 것도 없이 생업이 우선이겠으나 그게 해결 되었다면 나이 들수록 눈치 볼 것 없이 심신을 몰입할 수 있는 할 일이 있어야 한다. 백세시대를 살면서 경제적인 것과 건강만이 노후대책이 아니라 무엇을 하면서 나머지 생을 지루하지 않게 지낼 것인가, 남아도는 시간과 소일거리에 대한 대책을 세우고 경영도 스스로 해야 한다는 말이다. 심심하니까 아무나 붙잡고 놀아달라고 조를 수 없는 노릇이니 운동이든 독서든 음악이든 봉사든 무료하지 않을 만큼 시간을 유용하게 보낼 수 있는 일이 필요하다. 창의적인 일을 할 때 자존감을 지키고 보람도 있어 영혼에 도움이 되겠으나 그동안 시간에 쫓겨 해보지 못한 것을 배우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이제 시작해서 무엇이 되거나 이루겠다는 것이 아니라 배우고 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 공자님 말씀처럼 배우는 자체로 즐거움을 느끼면 그것으로 족하여 잠재된 에너지도 발견할 것이다. 남의 손 빌리지 않을 만큼의 건강한 몸과 정신이나 육신으로 몰두할 수 있는 일이 가슴 설레게 할 때 나이를 먹었더라도 젊게 사는 일이다.

태양은 여전히 내일 또다시 떠오르고 어려서 남겨놓았던 홍시는 타는 듯 빨간 빛으로, 젊은 날 애타게 바라던 시간의 질량으로 남아 기다리고 있을 터이다. 할 일이 있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징표이며 목숨만큼이나 소중하고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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