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암이 적요한데 벗 없이 혼자 앉아

평조 한닢에 백운이 절로 존다

어느 뉘 이 좋은 뜻을 알 이 있다 하리오

노가재에 찾아오는 벗이 없어 혼자 쓸쓸히 앉아있다. 평조 한닢을 읊조리니 산마루 흰구름이 절로 존다. 어느 누가 이 자족하는 마음을 알 이 있다 하리오. 한가로운 오후의 노가제 풍경이다. 맑고 평화로운 가락에 흰구름이 절로 존다니 빼어난 시구다. 평조는 국악 선법 중의 하나로 서양 음계의 장조와 비슷하다. 평조 한잎은 곡명으로 평조 대엽을 말한다.

1760년(영조 36) 그의 나이 71세. 김수장은 경치 좋은 서울의 화개동(현재 종로구 화동)에 자그마한 모옥, 노가재를 마련했다.

한겨레음악대사전은 ‘해동가요’에 있는 김시모의 ‘노가재기(老歌齋記)’의 노가재 풍경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창을 열고 앉으면 서쪽으로는 인왕산 필운대가 펼쳐져 있고, 동쪽으로는 낙산 파정(琶亭)이 보 인다. 문을 열고 나서면 북쪽의 연대(蓮臺) 주변에 감도는 구름을 볼 수 있고, 남쪽의 남산 잠두(蠶頭)를 희롱하는 저녁노을을 어루만질 수 있는 곳이 바로 노가재의 풍광이라고 기술하였다. 노가재에 살면서 얻은 그의 십경은 동쪽 고개에선 밝은 달을 볼 수 있고, 서쪽 산봉우리에선 매일 저녁 황혼녘의 낙조를 즐길 수 있었다. 그리고 남쪽의 누대에서 울리는 종소리를 듣노라면 북쪽 산에서는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경회루의 송림은 마치 앞마당에 온통 펼쳐진 듯하고, 푸른 하늘 가르며 오가는 백로, 인봉으로 피어오르는 아침 놀, 먼 마을에서 저녁밥 짓느라 피어오르는 연기, 골짜기에 가득한 꽃향기, 친한 벗의 거문고 연주에 맞추어 노래하는 멋, 이런 열 가지 멋스러운 경치를 김수장은 내내 누렸다.’

김수장은 숙종(1674~1720) 때 가객으로 서리로 일했다. 전라도 완산 출생으로 ‘해동가요’의 저자다. 노가재는 김수장의 호이자 김천택의 경정산가단과 쌍벽을 이루는 조선 후기 가단 이름으로 경정산가단과 함께한양의 가곡문화를 이끌었다.

18세기는 여항문화가 꽃피운 시기로 여항은 일반 백성들이 사는 골목길을 말한다. 상업의 발달로 상인을 비롯한 중인 계층이 성장하면서 이들이 중심이 돼 새로운 형태의 문화를 형성했다.

해동가요는 필사본 2권 1책으로 김수장이 편찬한 조선 3대 가집의 하나다. 1746년 편찬을 시작해 1755년 제1단계 편찬을 마쳤고, 1763년 제2단계 편찬이 완성됐다. 유명씨 작품과 자기 작품 568수, 무명씨 작품 315수, 모두 883수다. 작가별로 노래를 분류하고 작가마다 약력을 붙였으며 작품 끝에는 관계 문헌 또는 주를 달았다. 1769년 개정본에는 김우규 이하 9인의 76수 및 무명씨의 1수가 더 실려 있다.

‘해동가요’의 서문이다.

‘대개 문장과 시는 책으로 만들어져서 천 년이 넘도록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가요는 불리는 순간에는 찬사를 받지만, 그때가 지나면 사람들 사이에서 잊혀버리고 사라져버린다. 참으로 안타깝고 아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고려 말부터 지금까지 여러 임금님과 관리들, 선비와 가객, 백성과 어부, 기생들은 물론 이름이 알려지지 않는 이가 지은 노래들을 수집해서 책을 펴내면서 해동가요라고 이름 지었다. 부디 여기 적혀 있는 노래들이 오랫동안 전해지기를 바란다.’

조선의 예술가들 역시 실력이 뛰어나도 굶주림과 가난에 시달려야만 했다. 노가재에서 노래 소리는 끊이지 않았으나 그의 집은 언제나 가난했다. 예나 지금이나 예술가의 배고픔은 시대를 뛰어넘어 다를 바가 없으니 가난해야 작품이 나오는 것인가. 씁쓸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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