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순 시인·소설가

민족의 운명은 정체성의 유무로 판가름 난다. 정체성을 상실한 민족의 소멸은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수천 년 동안 한민족은 선비정신으로 관료의 부패를 막았다. 민중에게 충효(忠孝)를 불어넣어 수많은 외침에도 당당히 맞서 극복했으며 동방예의지국이라고 세계가 부러워했다.

그러나 지금은 눈을 씻고 봐도 선비다운 선비가 잘 보이질 않는다. 인의(仁義)와 인의를 바탕으로 한 예(禮)를 중시하고, 어떠한 질곡에도 절대로 굽히지 않는 대쪽 같은 지조를 지닌 선비를 찾을 수가 없어 안타깝다.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세상이기에 준법의식이 사라진 지 오래고, 악귀 같은 탐관오리들이 들끓어 올곧은 선비정신을 지니고서는 안락을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삼강오륜으로 기초를 다져 사(邪)를 버리고 부당한 권력의 겁박에 휘둘리지 않는 당당함을 포기한 체,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에 주눅 들어 대부분 긍정주의에 의지해 그렁저렁 살고 있다.

민주사회에 삼강오륜을 들이미는 것은 시대에 맞지 않다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선비정신은 우리 민족의 정체성이고 그 기반은 삼강오륜이 놓았다. 삼강오륜의 도덕성은 인정하면서도 세계 11위 경제대국, 대한민국에서 유교규범을 강조하는 것은 중화사대주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함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고대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무지의 소치다. 우리 한(韓)문화는 세계문화의 시원이고, 동이족의 이(夷)자를 ‘오랑캐 이’로 보는 것은 배달, 조선에 지배를 받아온 중국의 트라우마다. 이(夷)는 큰 대(大)와 활 궁(弓)의 합자로 큰 활을 가진 민족을 의미하며, 동이족은 막강한 군사력을 지녀 동북아를 지배하는 민족이라는 뜻이다. 그 당시에 활은 지금으로 치면 핵을 탑재한 ICBM(대륙간탄도미사일)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삼강오륜을 준수하는 것은 문화적 사대주의의 결과가 아니라 우리가 꼭 지켜야 할 윤리이며 한민족의 뿌리를 지키는 일이다. 임금 군(君)을 나라로, 신하 신(臣)을 백성으로 해석하면 이기주의를 넘어 개체주의에 빠진 더러운 서양문화 범람을 일시에 몰아낼 수 있는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윤리다. 삼강 중 군위신강(君爲臣綱)은 백성이 지켜야 할 도리인 충(忠)이요, 부위자강(父爲子綱)은 자식의 도리인 효(孝)이고, 부위부강(夫爲婦綱)은 아내가 지켜야 할 도리인 절개와 정조다. 남존여비를 강조하는 반인권적인 말이라고 투덜댈 수도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절대로 그렇지 않다. 오륜에 남자를 강제하는 의무가 들어있다. 부부유별(夫婦有別)이 바로 그것이다. 부부에게 각각 제 몫의 의무가 있다는 뜻으로 남편에게 어떠한 경우에도 가정을 지켜야 하는 의무를 부여한 것이다. 삼강이 인륜을 강조했다면 오륜은 의무를 규정했다. 아비와 아들은 친밀해야 하고(부자유친 父子有親), 친구는 서로 믿어야 한다(붕우유신 朋友有信), 나라와 백성은 정의로워야 하고(군신유의 君臣有義), 권력과 재물로 서열을 가리는 게 아니라 반드시 어른을 공경해야 한다(장유유서 長幼有序).

공황에 가까운 경제난 속에서 썩은 권력에 손가락질하는 것만으론 민족을 되살릴 수 없다. 국민이 모두 탐욕을 버리고 선비정신을 실천하는 길밖에 없다. 젊은이의 가슴속에 효(孝)가 산다면 삼포(연애·결혼·출산 포기)를 극복할 수 있고, 국민이 하나 되어 충(忠)을 바탕으로 한 삶을 살고 예(禮)를 실천한다면 그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다. 전쟁의 승패는 무력의 크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애국심의 크기로 결정된다. 베트남이 미국을 꺾고 통일한 것을 보면 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충(忠), 효(孝), 예(禮)를 최고의 덕목으로 삼는 한민족의 정체성을 되찾는 일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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