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우 前 전국공공연구노동조합 위원장

 

작년 5월 거제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대우조선해양의 사내하청업체 한 곳이 폐업했다. 회사를 새로 인수한 업체 대표는 두 달 치 임금을 받지 못한 노동자들에게 제안했다. 밀린 임금의 70%만 받고 계속 일하든지 아니면 100%를 다 받고 회사를 나가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많은 노동자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70%의 임금과 일자리를 선택했지만 25명의 노동자는 밀린 임금 100%를 받고 회사를 떠났다. 그렇게 떠난 노동자 중 한 사람이 두 달이 채 지나지 않아 예전에 자신이 일했던 현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회사를 떠난 노동자들은 어렵사리 새 일자리를 구했으나 막상 첫 출근하는 날 출입증 발급이 안 된다는 통보를 받았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가 없었다. 이제는 고인이 된 노동자는 한 달 동안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다가 대우조선해양의 다른 하청업체에 입사했다. 그런데 입사하고 일주일쯤 지났을 때 대우조선해양 측에서 하청업체에 연락해서 이 노동자를 채용한 것을 질책하고 바로 내보내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나지 않아 그는 고인이 되고 말았다.

이 노동자의 목숨을 앗아간 것이 바로 블랙리스트라고 주변 사람들이 주장했다. 사장에게 밀린 임금을 달라고 요구한 것을 부당한 단체행동이라도 한 것처럼 덮어씌우고 그런 노동자의 명단을 모아서 다른 하청업체까지 취업할 수 없게 관리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문제가 되자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그리고 불과 3일 만에 경찰은 블랙리스트가 존재한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고 결론지었다. 블랙리스트는 그 실체를 밝히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또다시 확인한 셈이다.

블랙리스트는 영국왕 찰스 2세가 즉위할 때 아버지 찰스 1세를 죽음으로 몰아간 이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만든 명단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살생부의 역사로 치면 왕조시대로 거슬러 가겠지만 특히 노동자들에게 블랙리스트는 70년대 이후 끊임없이 민주노조운동과 노동자들을 탄압해온 잔혹하고 전근대적인 도구였다. 정부와 국가 정보기관이 비밀리에 블랙리스트를 작성해 부당하게 해고된 노동자가 다른 회사에 취업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했는데도 그 존재가 노출된 적은 드물다. 90년대 초반 부산 금호상사 전산실에서 해고 노동자들과 각종 시국사건 관련자 등 8000여 명의 명단이 담긴 블랙리스트가 발견돼 사회적 문제가 되기도 했다.

노동계 블랙리스트가 노동 문제에 대한 정부의 적대적 인식 수준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라면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는 대통령과 고위 공직자들의 편협하고 야만적인 민낯을 보는 것 같아서 소름끼칠 정도다. 이전 선거에서 문재인 후보나 박원순 후보에 대해 지지선언을 했거나 세월호 시국선언, 세월호 정부 시행령 폐기 촉구 선언에 참여한 문화예술계 인사 9473명의 명단을 정부가 관리하면서 각종 불이익을 줬다. 심지어 박근혜 씨가 직접 진보 성향의 특정 작가와 출판사를 거론하면서 정부 지원에서 배제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블랙리스트는 비정상적 권력 유지를 위한 폭력이다. 블랙리스트가 작동하면 그 명단에 포함되지 않은 사람들조차도 일상적으로 자기 검열을 하게 만든다. 때마침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회자되고 있는 메릴 스트립의 골든글러브 수상 연설을 봤다. 메릴 스트립은 트럼프의 반이민자 정책과 장애인 기자 모욕 사건을 비판하고 권력의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원칙 있는 언론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또박또박 말했다. 인상적이었다. 우리나라에서 그랬다면 여지없이 블랙리스트에 오르고 갖가지 고초를 치렀을 것이다.

블랙리스트는 용납할 수 없는 비민주적이고 반헌법적인 행위다. 응분의 법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 1000만 개의 촛불을 더 밝히고 다시 1000일의 기도를 이어가더라도 이번에는 기필코 국민이 개돼지가 아니라 나라의 실제 주인이 되는 나라, 블랙리스트 없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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