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틀 방, 여인들의 욕마 분출장소가 되다

일요일과 공휴일은 늘 춤을 추면서 야단짓거리를 했다는데, 이들이 이젠 단순히 춤만 추는 게 아니었다. 거나하게 마시고 놀이까지도 병행을 했는가 하면 베틀 방에서 심지어 음탕한 짓까지 하자, 교회와 관청이 두 눈을 부릅뜨고 이런 것을 컨트롤하다가 금지령까지도 내렸는데, 사실 관청이 더 두려워한 것은 이런 장소가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비판들의 온상이 되지 않을까 하는 것 때문이었다.

시간이 더 흐른 시기인 1800년도에 여전했다. 시인 엠마누엘 가이벨(Emanuel Geibel:1815~1884)은 이들이 서로 싸우는 모습을 글로 남겨 두었고, 독일 풀다 부근의 로텐부르크의 한 목사도 청소년들이 이들의 행위를 보고 뒤따라 배우게 될까 두려워하는 글을 남겼다.

1833년에도 이런 일 때문에 한 목사의 고발문서가 남아 있는 것을 보면, 베 짜는 장소가 여전히 풍기문란 장소로 여긴 듯하다. 이런 베 짜는 장소가 생필품을 생산하는 절대적인 장소이기에 마땅히 존속은 해야겠지만, 시대에 따라 다소 변질 되어가는 모습을 두려워했다.

그러다 보니 찬반론이 흘렀다. 한쪽에서는 여인들이 이런 일을 하면서 그들의 욕구와 희망을 분출하는 장소로 보자고 주장하는 반면에, 다른 한편으로는 여인들이 물레로 벌어들이는 돈보다도 커피를 더 마신다는 비판과 더불어 이런 여인들이 커피를 얻어 마시고자 남자들을 유인하기도 하였다니! (아마도 이 시대가 커피가 처음 도입 되었나 보다).

이들의 이런 문화를 접하면서 몇십 년 전의 우리네 문화도 겹쳐진다. 바로 달리는 관광버스 안에서 노래하고 춤추던 여인들의 관광문화다. 당시는 이런 문화를 한편으로는 긍정적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부정적인 것으로 분리하면서 두 시각으로 보았다. 전자는 가정에서 억압된 삶을 살던 여인들이 이런 관광버스 여행을 통해서 억압된 감정을 해소하는 장소로 보았던 긍정적인 측면인데, 중세의 여인들도 마찬가지로 물레를 지으면서 억압되었던 스트레스를 노래와 춤으로 밤거리에서 풀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어찌하였든 베를 짜면서 모인 이들의 장소는 세기를 타고 내려오는 구술 전승의 역할뿐만 아니라, 지방마다 달리하는 베의 문양도 도출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견해를 학자들은 내리니, 베 짜는 여인들이 많은 긍정적인 요소를 문화사에 기여한 것은 틀림이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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