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형직 을지대학교 교목

30년 전 그해 여름은 뜨거웠다. 변화의 갈망으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로 가득했고, 한껏 목소리를 높였던 그날의 함성은 지금도 귓가에 울리는 듯하다. 그날의 열정은 승리로 기억됐지만 지도자들의 절제하지 못한 욕심은 분열이 됐고 오히려 문민으로 위장돼 군사독재의 명분만 안겨줬다. 새 시대를 기대했지만 이후로도 오랫동안 과거 체제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유신시대 성공과 번영의 기억들은 우리 사회 뿌리 깊은 이데올로기가 됐다. 짧은 기간 놀라운 성장으로 번영의 시대를 열었지만 적폐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은 그 때문이다. 새 시대의 기회는 여러 번 있었지만 과거 성공과 번영의 기억들이 번번이 역사의 흐름을 막아 세운 것이다. 1789년 프랑스 혁명에서도 비슷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혁명 이전에 프랑스는 절대군주가 소수의 귀족, 성직자와 결탁해 특권을 누리면서 대다수 국민을 지배하는 앙시앵 레짐(구체제)의 사회였다. 소수의 특권계층이 다수의 국민을 억압하고 통제하면서 온갖 특혜를 누리는 사회였던 것이다. 결국 이들 특권계층에 대한 불만은 혁명으로 이어지면서 체제의 변화를 예고하는 분기점이 됐다. 정치적으로 보면 프랑스 혁명은 절대왕정이 마감하고 시민사회, 더 나아가 민주주의로 가는 계기가 됐다. 또한 경제적으로는 봉건주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자본주의 시대를 여는 전환점이 됐다. 그러나 대다수 민중이 기대했던 누보 레짐(신체제)의 시대는 쉽게 오지 않았다.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정이 수립됐지만 나폴레옹이 등장하면서 전쟁과 혼란은 불가피하게 됐다. 그만큼 변화는 요원한 일이다.

변화는 근심과 환란이다. 희생과 고통을 요구한다. 익숙하지 않은 것은 불편하고 거부와 반발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역사의 진보는 일정한 방향으로 움직여왔고 그 방향은 역사의 주체자인 인간이 꿈꾸는 이상향을 지향한다. 역사의 흐름은 언제나 편중된 권력에서 다수에게 분배되는 것으로 진행됐다. 소수가 누려왔던 힘을 다수의 손에 쥐어주는 것이 역사가 흘러가는 방향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백성의 마음(民心)이고, 하늘의 뜻(天心)이다.

소수에 편중된 힘은 어느 순간 머무는 것을 거부하지만 이 힘을 지속적으로 누리기 위한 모략과 술수가 동원되면 다수를 향한 억압과 폭력이 된다. 저항과 반발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갈등이 폭발하기에 필연적으로 희생과 고통이 뒤따르게 되는 것이다. 저항과 반발이 극단으로 흐르면 혁명이 되는데 혁명의 완성은 결국 왕의 목을 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정초부터 내우외환이 심상치 않다. AI(조류인플루엔자)와 높은 물가가 근심이라면 초유의 국정논단 사태가 환란이다.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의 다양한 압력도 환란의 무게를 더한다. 확실히 변화는 역사의 요청이다. 그런데 근심과 환란은 있지만 변화를 구현할 희생과 고통이 보이지 않는다. 누군가 나서서 희생하고 고통을 끌어안겠다고 해야 그 뒤를 따를 터인데 그런 인물이 보이지 않는다. 혼란의 때이니 시기와 여건만 맞으면 권력을 잡을 수 있는 기회겠지만 희생과 고통을 말하지 않으니 모두 못 미덥기만 하다. 그러니 대다수 국민이 희생과 고통을 견뎌야 하는 꼴이다. 변화를 이룰 절호의 기회지만 변화가 힘든 까닭이다.

그래도 기대를 버리지 못하는 것은 촛불 때문이다. 스스로를 태워 주변을 밝히는 촛불의 가치는 희생이다. 이 겨울 시민은 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민주적 선거절차에 의해 뽑힌 대통령은 불통의 담을 쌓고 스스로 민주사회의 질서를 깨뜨렸다. 비상식적인 방법으로 헌법과 질서를 무시하며 민주주의와 국민주권을 모욕했다. 가히 역사의 퇴행이라 말할 수 있다. 이를 타개하고자 나선 것은 정치적 해법이나 의회권력이 아니라 촛불을 들고 광장에 나온 시민이다. 이들은 연령이나 계급, 종교, 이념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실현하려는 열망으로 촛불 아래에 모여들었다. 이들에게서는 권위나 억압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구체제에 대한 거부와 항거를 자유로운 문화축제로 승화시키면서 세련되고 질서 있는 시민의식을 보여주었다. 그런 면에서 이번 겨울은 앙시앵 레짐에 절망했지만, 동시에 스스로 미래를 선택하고 행동하는 누보 레짐의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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