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신해부 공개, 연극구경하듯 몰려들어

중세의 해부학은 어떠했을까?

먼저 들어가는 말을 좀 쓰고자 한다. 사실 해부학이란 자체가 엄연히 의학 분야에 속한다. 나 같은 사람은 의학과 이과에 너무나 먼 거리에 있는 문과에 속하는데 감히 해부학에 대해서는 글을 쓰다니? 이 얘기의 핵심은 중세의 얘깃거리이고, 중세 얘기의 일부로 해부학은 어떠했을까라는 사실을 들여다 본다는 것을 미리 밝혀둔다.

앞의 여의사 트로툴라 얘기에서 좀 밝혔듯이 당시의 동물실험에서 인간해부로 넘어가는 것은 파두아에서 시작했다고 살짝 언급했다.

모든 일에는 개척자들이 있기 마련인데 이 해부학의 개척자는 1514년에 태어난 A.페살(+1564)인데, 그는 이미 4대째 의술을 다루는 집안의 자손이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막시밀리안 황제(1459~1519)와 황제비의 주치의였다니 대단한 실력을 소지했다는 걸 잘 알 수 있겠다.

그 역시 이런 개척자의 길로 들어선 걸 보면 이 가문의 피를 이어받은 자손임이 틀림없다. 그는 파리에서 공부를 하다가 포기하고선, 다시 한 아라비아 의학 연구소에서 의학을 배운다. 여기서 의학 수업증서를 받고선, 다시 1222년에 세워진 파두아대학에 응시한다. 이 대학은 당시 해부학이 발달했다 보니 유럽 전역에서 이름을 날리던 대학이었다. 이 대학에 다시 도전했던 그는 1537년 가을에 의사 자격증을 취득하게 된다. 그 이후로 그는 해부학과 정형외과 교수로 재직하게 되는데, 이렇게 그가 빨리 교수직에 취임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그가 의사시험 때 보여준 그의 탁월한 실력 때문이었다고 D.싸세 교수가 밝힌다.

무엇보다도 큰 관심거리는 그가 이렇게 인간 해부를 할 때는 사람들은 연극티켓을 구입하여 연극을 보는 것처럼, 해부티켓을 구입하였다 한다. 이런 때는 학생들은 물론 일반인들까지 몰려와 이 시술을 연극처럼 보았다고 한다.
 

그가 스위스 바젤에 체류 중이었을 때다. 1534년 3월 12일 한 남자가 도둑질 하다가 사형당했다. 그는 이 시신을 가지고 공개적으로 시신을 해부했다. 이때 역시 관심 있는 많은 이들이 구경하러 몰려들었다고 한다. 표 값이 대체 얼마쯤이었을꼬? 연극이나 음악회 갈 때처럼 이들은 멋진 옷을 입고 갔을까? 파트너를 동반해 팔짱을 끼고 갔을까? 우리가 서양영화에서 보았던 멋진 포즈를 취하면서…. 아무래도 그건 아닌 듯하다. 시체 해부를 보러 가는데 뭘? (다음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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