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월근(아름다운세상 이사장)

목민심서(牧民心書)를 쓴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영조 38년 6월 16일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 소천(오늘날의 양주군 와부면 능내리)에서 정재원 선생과 해남 윤씨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 당시는 신학문의 바람과 함께 천주교가 국내에 스며들던 때로 정치·경제·사회·문화 등의 측면에서 많은 변화를 가져온 시대였다. 다산은 8대가 옥당(玉堂) 출신인 명문가이며, 그의 아버지는 진주목사(晋州牧使, 현 진주시장)를 지냈다. 외가는 윤선도의 후예인 윤두서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도 한다.

그는 모든 기초학문을 두루 섭렵한 뒤 22세 때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성균관에 들어가고, 세자책봉 경축 과거시에 뽑혀 드디어 정조 임금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28세 때 대과에 합격해 성균관 직강, 홍문관 교리 등을 거치면서 정조 임금의 신뢰를 받아 33세 때 암행어사가 되어 경기도 일대 지방행정의 부패상과 관리들의 착취에 시달리는 농민생활의 현상을 눈으로 보고 그는 개혁의 의지를 불태우게 된다.

39세에 형조참의에 올랐지만 정조가 죽자, 그를 시기하는 반대 파벌의 모함으로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 순조 1년에 일어난 천주교 탄압 사건)에 연루되어 40세에 유배생활을 시작해, 경북 포항 장기에서 전남 강진으로 옮겨 18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였다.

그런데 그는 유배생활 중 다산초당에서 자신의 학문을 집대성하였다. 그는 ‘주역’, ‘춘추’, ‘논어’, ‘맹자’ 등 유교 경전을 새롭게 해석하고,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의 저서 집필에 몰두하여 경집 232권, 분집 260여권을 후세에 남겼다.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牧民心書) 서문에서 “백성을 부양하는 일과 다스리는 일을 목민(牧民)이라 하였고, 그러므로 군자(君子)의 학문은 수신(修身)이 반이고, 나머지 반은 목민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심서(心書)라 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목민할 마음은 있으나 몸소 실행할 수 없기 때문에 심서(귀양살이에 마음 뿐)라 이름 지은 것이다”라고 적어 놓았다.

다시 말하면 목민심서는 귀양살이 18년 동안 저술한 책 가운데 하나로, 목민관으로 부르는 지방 수령이 지켜야 할 지침을 밝히면서 관리들의 폭정을 비판했다. 책의 내용을 살펴보면 부임(赴任), 율기(律己, 자기 자신을 다스림), 봉공(奉公), 애민(愛民), 이전(吏典), 호전(戶典), 예전(禮典), 병전(兵典), 진황(賑荒, 흉년에 곤궁한 백성을 구하여 줌), 해관(解官, 관원을 면직함) 등 12편으로 구성되어 있고, 편마다 6조로 나눠 모두 72조로 세분하여, 오늘말로 말하면 행정 각 부처 공직자의 직무 수칙과 처신에 관한 행동강령을 밝혀 놓은 것이다. 그 당시 부정과 부패가 극에 달한 조선 후기의 지방사회 실정과 정치의 실체를 민생 문제 및 수령의 본무(本務)와 결부시켜 소상하게 밝히고 있는 명저라 할 수 있다.

목민심서를 떠올리며 오늘의 나라 현실을 생각하여 본다. 장관과 청와대 비서진이 수갑을 차고 날마다 TV에 어른거리며, 한편으로는 좌니, 우니 하는 시위대의 온갖 집회가 이어져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또 가짜 뉴스가 범람하는 가운데 정치판은 ‘대통령병’에 걸린 사람들이 나라와 국민에 대한 걱정은 제쳐 두고 철없는 공약만 날마다 쏟아내고 있으니, 위정자들과 고위 공직자들 모두가 정신이 나간 것 같다.

반기문 전 UN 사무총장이 퇴임 후 고국 땅을 밟은 지 20일 만에 정치판이 마치 갯벌 수렁 같은 줄을 모르고 대선판에 달려들었다가 주위의 모두가 돈 타령만 해대니, 두 손을 들고 말았다. 그가 냉혹하고 비열하고 추잡한 현실 정치판의 뒷마당을 몰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난 총선에서 국회의원에도 떨어진 사람들까지 우후죽숙처럼 대선에 나선다고 하니 우리 국민의 눈이 무섭지도 않은가?

고위 공직자와 정치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목민심서’ 책 한 권은 일독할 것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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