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우 前 전국공공연구노동조합 전 위원장

연초부터 휴가를 냈다. 오래 전부터 동료들과 계획했던 여행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휴가를 내는 기분은 별로 가볍지 않았다. 지난해 10월부터 시작한 탄핵 정국이 갈수록 혼미한 상태로 접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 국민의 상식으로 보자면 당연히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순순히 물러나야 할 사람이 도리어 적반하장의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마치 거대한 음모가 자신을 곤경에 처하게 만든 것처럼 피해자 흉내를 내기까지 했다. 분노는 컸지만 촛불을 드는 것 이상의 행동을 하지는 못했다. 촛불 하나 밝히는 사람들의 심정이 멀리 있는 나에게도 전해졌다. 여행 도중에 내내 내가 살고 있는 나라에 대해서 곱씹어 봤다. 나라의 법과 제도는 제 역할을 하고 있는가. 정부는 국민들의 행복한 삶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함께 행복하게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저마다 얼마나 애쓰고 있는가?

유럽 어느 관광지에서 버스 시간표를 유심히 살피고 있던 나에게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버스 노선에 대해서 혹시 궁금한 점이 있는지를 묻는 것이었다. “고맙다. 내용을 모두 이해하고 있다” 하고 말을 끝내자 그 여성은 곧 다른 사람들의 질문 공세를 받았다. 버스 노선뿐만 아니라 운행 시간, 도착지에서 막차 시간, 그 버스를 가장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방안까지. 그의 답변은 청산유수였다. 그제서야 나는 그가 회사에서 버스 정거장에 파견한 직원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어쩌면 직원이 아니라 스스로 신이 나서 그런 역할을 자처한 자원봉사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 나라들의 물가는 대체로 낮았다. 특히 주식인 빵이나 쌀 가격은 매우 낮았다. 1~2유로(1220~2440원) 수준의 저렴한 빵값은 굶주린 사람들에게 구세주나 다름이 없었다. 한국에서는 정치적 격변기를 틈타 공공요금과 생필품 가격을 마구 인상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한 잔에 1유로 수준을 벗어나지 않는 커피 한 잔 가격은 실로 충격이었다. 4000원짜리 밥을 먹고 7000원의 커피를 마신다는 한국의 현실에 견주면 말이 안되는 얘기였다.

국민의 재산권을 보장한다는 헌법정신이라는 미명 아래 실제로는 가진 사람들의 재산을 지키려고 일관되게 노력해온 정부의 업적(?)이었다. 때마침 소득 상위 10%가 전체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48.7%나 된다고 언론이 대서특필했다. 2000년도만 하더라도 상위 10%의 소득 비중은 36.4%에 머물렀는데 그 사이에 부의 집중은 더욱 가속화됐다. G20 정상들과 다보스포럼조차 소득 불평등의 문제가 전지구적으로 해결해야 할 주요한 과제라고 지적했지만 한국은 철저히 그것에 역행하고 있다.

왜 이렇게 불행한 일들이 한국에서 열심히 사는 노동자와 서민들의 몫으로 넘겨지는 것일까? 다양한 진단과 처방이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규제완화에서 비롯됐다고 누군가 지적했다. 개인의 재산권 보호는 절대가치가 아니라 공동체를 위해 적절하게 조절할 수 있다는 점을 외면하고, 가진 자들의 탐욕을 보호하기만 했던 사람들의 잘못이라는 말이다. 위정자들, 관변 학자들, 재벌들, 언론들, 그리고 부조리한 세상을 방치한 채 자신들의 안온한 일상에 충실하고자 했던 우리들의 잘못이다.

그런데 우리 모두에게 잘못이 있다는 말은 혹시라도 타당한가? 설령 모두가 잘못했더라도 무겁고 가벼움을 분별해 책임을 묻는 것이 합리적이라면 현재 한국사회의 모습은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의 잘못이 훨씬 크다. 4·19, 80년 광주항쟁, 87년 민주항쟁, 그리고 1000만 명 이상이 뜻과 힘을 모으고 있는 오늘의 촛불집회를 보라. 우리 노동자 서민들은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열심히 살아왔고 때로 목숨 이상의 것을 바쳐왔다. 잘못이 있으면 대통령이라도 책임을 면할 수 없고 그가 행사한 권력의 크기에 비례해 더 크게 벌해야 한다. 광장에서 잠시 벗어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런 원칙을 세우는 것이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책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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