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개성 제대로 살린 연기 일품, 코믹요소로 신분 굴레·현실 풍자

‘춘향전’을 재해석했다는 ‘방자전’이란 이름을 듣는 순간, 사람들의 기대는 제각각으로 퍼졌다. 조여정의 노출에 눈을 밝힌 사람도 있고, 하인인 방자와 춘향의 사랑, 낙동강 오리알 신세로 전락하는 방자의 복수 등을 기대한 사람도 있다. 그런 춘향전을 뒤집는 ‘방자전’이 방자하게 찾아온 것이다. 단아하면서 아름답고 변사또에 대항한 지조있는 여성으로 기억되는 춘향이 원래 그런 인물이 아니었다는, 고전을 뒤집는 파격적인 설정이 눈에 띈다. 최근 고전을 각색하는 열풍이 불고 있지만 ‘방자전’은 재해석의 경지를 넘어 심하게는 도발로 불릴 만한 모험이다. 하지만 ‘스캔들’ ‘음란서생’으로 탄탄한 사극을 만든 김대우 감독이 지휘봉을 잡았다는 건 큰 위안이 된다. 도리어 걱정보다 기대를 높였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미인 춘향, 잘생긴 방자, 못생긴 이몽룡‘방자전’의 전반적인 내용은 ‘춘향전’과 비슷하다. 다만 방자와 춘향이 서로 좋아해 춘향은 신분상승을 목적으로 몽룡에게 접근한다. 이 사이에서 방자와 몽룡은 각자 다른 생각을 품고, 춘향의 속내는 결국 마지막에 드러난다. 가장 중요한 건 외적의 변화다. 춘향은 그대로 미인이지만 선남이라 생각했던 이몽룡은 ‘잘생겼다’는 호칭을 붙이기엔 맥없는 웃음이 나오는 외모다. 오히려 방자가 훤칠하고 힘까지 좋다. ‘방자-춘향’을 이야기하기 위해 꽤 많이 뒤집지 않았는가.◆인물 특징 정확히 잡아낸 작품전작 ‘음란서생’에서 한석규, 이범수 등 주·조연 인물 성격의 특색을 잡아내 영화를 풍성하게 만들었는데 ‘방자전’도 이런 장점을 훌륭히 계승한다. ‘싱글즈’ ‘광식이 동생 광태’ ‘아내가 결혼했다’ 등 유독 사랑 앞에서 약한 남자로 나온 김주혁은 ‘방자전’에서도 조금 다른 변화를 꾀한다. 갖고 싶은 것을 얻기 위해 안달난 모습과 사랑하는 이에게 자존심이 무너지는 강요까지 해야 하는 슬픈 주인공 방자로 비련한 사랑의 주인공이 됐다. 조여정은 ‘재발견’이란 단어를 붙일 만큼 춘향의 이야기 속에 완벽히 녹아든다. 하인까지 사랑에 이용하는 비열한 이도령 역에 류승범은 능청스러우면서 자연스러운 연기로 얄미운 캐릭터를 훌륭히 소화했다. 전작에 이어 감초인 마노인으로 출연한 오달수는 개성 넘치는 연기로 코믹 사극의 한 획을 그을 거라 장담한다. 그러나 전작과 가장 큰 다른 점은 의외의 인물에서 엄청난 재미를 건져 올렸다는 점이다. 바로 변학도를 연기한 송새벽이 그 주인공이다. 생긴 것도 바보 같은데 하는 짓은 더한 변태 바보가 탄생한 것이다. 실제로 등장하지 않은 장판봉 선생이 얼마나 힘이 좋고, 훌륭한 신체(?)를 지녔는지 상상이 갈 정도로 사람의 특징을 정확히 잡아낸 감독의 재능은 ‘방자전’에서도 어김없이 잘 작동했다.◆음란하지 않고 은은하게 다가온 色‘음란서생’은 노골적으로 다양한 자세를 선보이며 남자들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에 비해 ‘방자전’은 은은하다. 300년 전 연애 고수의 작업 신공은 부드럽고 서서히, 그러나 은근히 색기있게 진행된다. 툭 기술, 차게 굴기, 은꼴편, 뒤에서 보기 등 순수 한글로 만들어낸 19금 여심을 사로잡는 방법은 15세 관람가 ‘작업의 정석’에서 알려줄 수 없었던 진한 향기를 풍기며 재미뿐만 아니라 본격적인 사건의 발판을 마련한다. 남자가 사랑을 확인하고픈 순수한 욕망에서 비롯된 애정장면은 19세 이상 관람자만 볼 수 있는 농도 짙은 연기로, 남성들은 필히 침 닦을 손수건을 준비하는 게 좋다. 짧지 않은 시간 한국영화에서 영화관에 걸릴 수위까지는 최대한 보여줬다. 색(色)을 보기 위해 극장을 찾는 사람은 없겠지만, 책으로 연애를 배운 몽룡이가 되고 싶지 않기 위해선 영화관을 찾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 될 것이다.◆완전히 뒤집기보단 살짝 반전을…정절을 지킨 춘향? 사랑의 큐피트 방자? 정의로운 몽룡? ‘방자전’은 초반부터 ‘춘향전’을 뒤집는다. 그네를 타는 아름다운 장면은 이 영화에서 기대하지 마라. 그렇다고 방자와 춘향의 순수한 사랑도 아니다. 그 사이엔 핵심인물 ‘마노인’이 있다. ‘춘향전’에서 유일하게 등장하지 않은 방자의 아바타 주인 ‘마노인’은 방자와 춘향을 연결하는 것과 동시에 월매를 알고 있는 인물로 ‘방자전’에서 그를 빼고 이야기가 흐르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 그의 과거사가 정확히 나오지 않은 점도 다양한 상상을 펼칠 여운을 남겼다 볼 수 있을 것이다. 누구나 다 아는 ‘춘향전’을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로 탈바꿈하면 ‘춘향전’을 꼬았다는 설정 자체가 이치에 안 맞았을 터. 틀은 그대로 잡되 방자와 춘향의 사랑에서 변화를 주어야했기에 ‘방자전’은 반전을 꾀한다. 우리가 아는 이야기가 도대체 어떻게 전해졌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주인공들은 결국 ‘춘향전’으로 퍼질 수 있는 아름다운 만행으로 결론짓는다. 더럽게 꼬인 네 남녀 사이에서 주목받지 못한 향단이의 사랑과 ‘방자-춘향’ 커플의 최후는 이 이야기가 미담으로 바뀌기 위해 묻힌 안타까운 실화가 아닐까 생각해본다.◆사랑의 메신저에서 사랑의 주체자로…‘방자전’은 따뜻하면서 슬프다. 배우들 연기도 일품이다. 인물 각각의 개성을 살린 솜씨도 좋았다. 다른 무엇보다 ‘방자전’이 말하는 사랑과 아픔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주겠다. 남녀가 살갗이 부딪히는 적나라함과 끈적거림 속에서 신분의 굴레와 현실을 벗어나고픈 슬픈 정서를 이끌어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김대우 감독은 해냈다. 기대 이상의 정사장면은 욕망과 타락, 순수와 열정까지 담아냈고 고개를 끄덕일만한 재치있는 춘향전의 재해석은 공감대를 불러일으킨다. 대표적인 미담인 ‘춘향전’에 대한 훼손이라 몰아세울 수 있지만, 코믹적인 요소와 함께 춘향, 방자, 몽룡, 향단 4명의 주인공 모두 사랑에 있어서 승자가 되지 못했다는 결말은 해피엔딩으로 끝난 본래의 작품보다 더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조선시대 멜로로 사랑하는 이가 못 이룬 것을 완성시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아름다운 퍼즐 조각을 맞춘 ‘춘향전’의 새로운 해석은 가슴 속에 오래도록 남아있을 듯하다. 슬프고 안타까운 이야기는 영화가 끝나도 자리를 일어나기가 힘든 깊은 여운을 남겼다.네이버 파워블로거 재현랄프blog.naver.com/lalf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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