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형직 을지대학교 교목

주형직 을지대학교 교목

바쁘고 빠르게 살아가는 탓일까 매일 매일이 숨 가쁘고 따라가기 벅차다.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과 성취가 공허와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는 비결이라 외쳐왔으면서도 익숙한 것과 결별하는 것은 매번 힘들다. 그러니 각박하고 여유가 없다. 양보가 쉽지 않고 배려가 어려운 것이다. 혹자는 사랑이 없는 탓이라고 탄식한다.

실제로 양보와 배려를 찾아보기 힘들고 희생이나 용서는 사전에나 있는 단어처럼 생각된다. 길을 가다 부딪치기라도 하면 사과대신 인상을 쓰고 낯선 이들이 말을 붙이면 먼저 적대감을 갖고 대한다. 이웃이 어려운 일을 당해도 웬만하면 모르는 척하는 것이 피해 보지 않는 현명한 방법이라 믿는다. 어느새 이타적인 사랑은 점점 더 낯선 단어가 되고 있다.

전통적으로 우리 사회는 정(情)과 한(恨)이라는 독특한 문화가 있었다. 서로를 향한 교감과 이해는 이 두 문화를 공유해온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특징에서 비롯된다. 오랫동안 신분사회를 유지하느라 억압과 희생을 강요당했으면서도 국가로부터는 보호받지 못하는 사회였다. 온갖 힘들고 궂은일을 감당해야 했지만 위급할 때는 보호받지 못했으니 억울한 마음을 갖게 됐고 그것이 반복돼 한이 남았다. 국가와 사회 시스템에 대한 낮은 신뢰와 스스로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 가운데 누구도 믿지 못하는 DNA가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한(恨)은 비슷한 처지의 사람에게 갖는 동정과 긍휼의 원천이 되기도 했다. 근본적으로는 자기연민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다양한 감정이 섞이며 정(情)이 쌓이게 되고 서로가 서로를 감싸고 돕게 된 거다. 억울한 마음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었기 때문에 서로 돕고 위하는 정의 문화가 동시에 발달했던 것이다.

힘없는 백성들은 억울하고 부당한 일을 많이 당하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이웃의 도움으로 이겨낼 수 있었다. 억울한 마음은 컸지만 감사한 마음 또한 삶의 여백을 채웠기에 팍팍한 삶에도 사랑을 나누고 베풀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한(恨)이 깊은 곳에는 정(情)도 진하게 경험하게 된다. 잘사는 동네의 처마보다 가난한 동네 풋내 나는 골목길에서 정을 느낄 수 있고 고위 공직자나 부자들에게 괜한 반감을 갖는 것은 오랜 세월동안 한을 끌어안고 정을 나누며 살아왔던 삶의 모습과 무관하지 않다.

그런데 이제는 서로 돕고 살아가던 모습이 사라져 가고 있다. 먹고살 만해지기는 했지만 이전보다 행복하다고 느끼지 못하는 이유다. 서구가 단계적으로 발전시킨 근대화 과정을 좇아가기 위해 속도를 강조했고 경쟁을 강조했다. 산업화과정을 압축해서 경험하기 위해서는 속도와 경쟁이 매우 유용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속도와 경쟁에 따라 교육목표 역시 전인적 인재 양성이 아니라 분야별로 뛰어난 소수의 엘리트를 키워내는 것이 목표가 됐다. 경쟁력 있는 인재를 우대하고 경쟁에서 밀리면 도태시키는 사회구조가 선진국을 따라잡기에 용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같은 상황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된다. 우리 사회의 상식을 초월한 교육열은 이 때문이다.

경쟁력을 갖추고 이기는 데 능한 인재를 만드는 것은 결국 물질적인 투자와 정보력이 승부를 결정짓는 열쇠가 된다. 할아버지의 경제력과 엄마의 정보력이 명문대학 입학을 결정짓는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점점 더 빈부가 고착화되고 경제적 신분을 뛰어넘기 어려운 사회가 돼 가는 것이다.

이런 여건이라면 깨끗하고 공정한 승부가 될 수 없다. 사회가 불공평하다고 느끼기에 대중은 저항하고 분노를 키우며 억울하다고 생각한다. 이기기 위해서 반칙과 불법을 자행하고 모두가 경쟁자이기에 배려나 양보를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여전히 한(恨)은 풀지 못하고 있는데 정(情)이 실종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답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산술적으로는 별다른 희망이 없어 보이지만 역사는 수많은 역설과 반전을 품고 있다. 한판 뒤집음이 없다면 역사는 단절된다. 역류와 순류가 뒤엉켜 흘러야 조화롭게 되고 그래야 생명이 유지된다. 역사는 절망 속에서도 끊임없이 생명을 잉태했다. 새로운 세상을 기대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다만 혼란스런 시대를 참고 견디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하다. 지금은 한(恨)이 아니라 정(情)이 더욱 요구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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