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현 대전시의원

어느 집이나 가정사가 있기 마련이다. 우리집에도 가슴 깊이 품고 있는 가정사가 있다. 암울했던 시기 부모님의 가정사는 어느 가정이나 마찬가지리라. 그러나 우리집엔 누나의 가정사가 하나 더 있다. 나보다 1살 위인 누나는 우리집의 수호천사다. 자신을 희생해 가정을 일으켜 세우고 동생들 공부까지 시켰으며, 지금은 중풍으로 8년째 병원에 계신 어머니를 매일 돌보고 있으니 어찌 수호천사가 아니라 말할 수 있으랴.

집안 형편이 곤궁했던 시절, 누나는 중학교 입학 등록금으로 외삼촌의 수술비를 도와 중학교를 가지 못하고 공민학교(지금의 학력인증 평생학습시설 정도 되겠다)에 다니며 돈 벌러 직장에 나갔다. 어린 나이에 대구의 한국화섬이란 곳에 직조 여공으로 일하러 나간 것이다.

한 학년이 21반이나 되는 초등학교에서 전교 1등을 맡아놓았던 수재였던 누나가 남동생이 셋인 집안을 도우러 그렇게 학업을 사실상 포기한 것이다. 이후 여상 야간부에 다니며 돈을 벌었고, 졸업 후엔 대학 진학 대신 동생들 학비를 댔다. 이후 방송통신대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밝아 사회복지사가 돼 어르신들 돌보는 일을 하며 친정까지 돌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배움의 한을 가진 분들이 많다. 그중 가정의 어려움을 대신해 희생하고, 남동생이나 오빠들을 뒷바라지하느라 학업을 포기하고 돈 벌러 다닌 어머니들, 누나들이 많다.

대전에 예지중·고가 있다. 우리 누나가 다녔던 공민학교처럼 학력인증 평생학습시설이다. 여기엔 우리 누나 같은 배움의 한을 풀려는 나이든 여학생들이 많다. 80% 이상이 40대 이상이다. 70·80대 할머니들도 있다. 나이 드신 분들이 배움의 한을 풀, 대전에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학교다. 이 학교 출신으로 대학에 진학하고 사업가나 전문인으로 활동하는 분들이 적지 않다. 대전시의원도 배출했다. 그런 예지중·고가 2년째 몸살을 앓고 있다.

교장을 겸직한 예지재단 이사장이 교직원들에게 금품을 강요해 억대의 돈을 수수했다가 교육청 감사에 적발돼 사퇴했고, 그 후 학교 정상화를 위한 합의서를 번복하면서 파행 운영이 이어지다 23년 전 설립 시부터 근무해 왔던 교감을 파면조치하면서(노동위원회에서 부당해고로 판정했으나 미복직 상태임) 급기야 학생들의 수업 거부 사태를 초래했고, 무자격 교장을 임명해 교육청으로부터 해임 요구를 받았다가 지난 25일 우여곡절 끝에 눈물의 졸업식이 치러졌다. 파행이 지속되자 지난해 11월 교육청으로부터 이사 전원 취임승인취소 처분을 받은 예지재단은 소송으로 버티고 있고, 올 2월에는 학교가 정상화될 때까지 신입생 모집을 중단하라는 교육청 공문을 받아 신입생 모집도 어렵게 됐으며, 지난해 9월부터 교육청 보조금도 끊겨 5개월째 교직원 급여가 지급되지 않는 등 정상화는 요원해 보인다.

이 사태의 원인은 재단 이사장 및 이사들의 탐욕과 비리로부터 시작됐고, 피해자는 600여 명의 만학도들이다. 급여도 받지 못하는 교직원들도 피해자다. 교직원은 재단 측 교직원과 학생 측 교직원들로 나뉘어 불신이 커지고 있고, 담임교사가 졸업식에조차 나타나지 않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렇게 만학도들의 꿈과 희망이었던 학교가 재단 이사들의 탐욕에 절망과 분노, 불신의 현장으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교육청의 봐주기 의혹 등 미온적 대처가 사태를 키운 탓도 있지만, 비리 재단이 이렇게 오랫동안 파행 운영으로 버티기를 하는 데는, 우리 지역의 유일한 시설이기 때문이란 점도 한몫한다고 하겠다. ‘어차피 이곳 아니면 너희들 갈 곳도 없잖아?’

이에 필자는 우리 지역에 ‘공공형 학력인증 평생학습시설’을 추가로 설립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부산이나 타 시·도에선 여러 개 시설이 운영돼 학생들의 선택의 폭이 넓어 예지재단 같은 폭력을 일삼지 않는다. 전북에선 도가 직접 학력인증 평생학습시설을 운영하고 있어 만족도가 높다.

대전에서도 이번 기회에 공공형 평생학습시설을 설치해 만학도들의 선택의 기회를 넓혀야 한다. 필자는 시의회 예지중·고정상화특위 위원으로서 이를 공론화하고자 한다. 시교육청 소유의 유휴 학교시설이 여러 개 있다. 교육청은 이러한 시설을 제공하고 시는 운영비를 투자해 대전평생학습진흥원 부설로 두는 것도 좋을 듯 싶다.

이를 위해 대전시와 교육청, 의회가 협의해 반복되는 예지재단 비리와 파행 운영을 근절하고, 만학도들의 눈물을 닦아줘야 한다. 눈물의 졸업식을 마친 만학도들에게 축하와 격려의 마음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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