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민족·민주행위 경력으로 논란을 빚고 있는 김창룡의 묘

 

1919년 3.1 운동은 우리 민족 독립운동사에 새로운 전기를 가져온 중대한 변곡점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됐고 다방면에 걸친 독립운동의 방향에 대한 논의가 시작됐다. 독립운동에 있어 3.1절이 갖는 큰 의미다. 그러나 해방 70년이 지났지만 우리 곳곳엔 청산하지 못한 과거사의 흔적이 여전히 논란지점에 있다. 수많은 애국지사와 순국선열들이 묻힌 국립대전현충원(이하 현충원)도 그렇다.

98주년을 맞는 3.1절에도 현충원에 묻혀선 곤란한 사람들이 묻혀있다는 주장이 여전히 제기되고 있다. 일제치하 일본에 부역한 반민족행위자는 물론 해방 이후 독재·군사정권에 협력한 반민주행위자까지 현충(顯忠)에 걸맞지 않은 인사들이 함께 잠들어 있다는 판단에서다.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에 따르면 김창룡(1920~1956)이 대표적이다. 지난 1998년 현충원에 이장된 김창룡의 묘비엔 1945년 해방 이전 기록은 단 한 줄도 적혀있지 않다. 일본 관동군 헌병 보조원 등으로 대표되는 친일 경력은 묘비에 적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엔 김창룡 그 자신이 안두희(1917~1996)를 사주해 죽음으로 몰고 간 백범 김구(1876~1949)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1859~1939) 여사와 그의 아들 김인(1917~1945)이 잠들어 있다. 아들을 죽인 살인자와 죽은 이의 어머니·아들이 같은 공간에 잠든 기묘한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묘지는 이장했지만 기꺼이 흔적을 남긴 사람도 있다는 게 연구소의 주장이다. 애국지사 신경애(1907~1964)의 남편인 강영석(1906~1991)은 광주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해 해방 이후 건국훈장을 추서 받았지만 훗날 친일 행각이 발각되자 부인의 안장 자격을 이용, 합장해 여전히 현충원에 잠들어 있다고 연수소 관계자는 말했다. 이외에도 12·12 군사반란에 협력한 박준병(1933~2016), 유학성(1927~1997),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시위대를 진압한 소준열(1931~2004) 등 최근엔 장성 출신 반민주행위자들의 현충원 안장이 이어지고 있다고 이들은 우려했다.

현행 ‘국립묘지법’은 피안장자 유가족으로부터 이장 요청이 있어야 현충원 이외 다른 장소로 이장이 가능하다. 유가족들이 현충원에 이장하겠다는 의사를 밝히지 않는 한 친일행각이나 반민주행위자에 대한 이장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다. 프랑스의 국립묘지인 팡테옹(Pantheon)을 보면 우리 현충원에 반민족·민주행위자들이 안장됐다는 주장에 수긍하게 된다. 이미 전후 두 차례 과거사를 청산했던 프랑스의 경우엔 팡테옹 안장 기준이 엄격하기로 유명하다. 안장을 하기 위해선 최소 10년을 기다려야 한다. 이 기간의 평가를 통해 안장여부가 결정되기 때문에 피안장자 과거사에 대한 논란은 거의 없다. 최대 한 달이면 안장이 가능한 우리 현충원과는 상반된 모습이다.

반민족·민주행위자의 묘지 이장 문제는 이미 오래전부터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제기돼 온 사안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수 년 전부터 국립묘지법 개정을 요구하고 있지만 매번 수포로 돌아갔다. 지난 2007년 당시 열린우리당 김원웅 의원을 중심으로 한‘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 법률안’이 그랬고 2013년 민주당 김광진 의원이 친일반민족행위자의 국립묘지 안장 금지와 이미 안장된 자도 이장할 수 있게 하는 내용의 법률 개정안을 냈지만 이 또한 그랬다.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 홍경표 사무국장은 “현충원에 반민족·민주행위자들이 버젓이 묻혀있는 것은 민족정기를 훼손하는 것임과 동시에 후세들에 대한 올바른 역사교육에도 부합하지 않는다”며 “반민족·민주행위자가 국립묘지에 안장될 수 없게 법 규정에 명시하고, 이미 안장돼 있는 자도 이장을 강제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는 것이 현충원의 영예성을 제고하는 유일한 길이다”고 말했다.

글·사진=이준섭 수습기자 ljs@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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