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부대 교수

댁들에 나모들 사오 져 쟝스야 네 나모 갑시 언매 웨난다 사쟈 싸리남게난 한 말 치고 검부남 게난 닷되를 쳐서 함하야 혜면 마닷되밧습내 삿대혀 보으소 잘 븟슴나니 한 적곳 사 따혀 보며난 매양 사따히쟈 하리라

작자 미상의 대화체로 이뤄진 나무장사의 노래다. 여러분들 나무들 사시오. 저 장사야, 네 나무 값이 얼마냐? 싸리나무는 한말 치고 검불나무는 닷되를 쳐서 합하여 계산하면 마닷되 올시다. 사 때어 보소 잘 붙나니 한번만 사 때어보면 항상 사 때자 할걸요.

6·25 사변 이후까지, 연탄이 보급되기 이전에는 나무 장사를 흔히 볼 수 있었다. 나무는 매일 밥을 해먹어야 하고, 한겨울을 넘기려면 없어서는 안 될 삶과 직결된 필수품이었다. 주업으로 하는 나무장사도 있었고 농한기에 부업으로 하는 나무장사들도 있었다. 그리고 1960~70년대 만해도 화폐 대신 물건 값을 매길 때는 쌀 몇 가마, 몇 말 등으로 환산해 말하곤 했다. 나무장사 얘기는 이제는 먼 옛날 이야기가 돼버렸다.

댁들에 동난지이 사오 져 샹스야 네 황후 귀 무서시라 웨난다 사쟈 외골내육(外骨內肉) 양목(兩目)이 상천(上天) 전행후행(前行後行) 소(小)아리 팔족(八足) 대(大)아리 이족(二足) 청장(靑醬) 아스슥하는 동난지이 사오 쟝스야 하 거복이 웨지말고 게젖이라 하렴은

황후는 황화(荒貨)로 잡화나 팔 물건을 말하고 청장은 맑은 간장을 말한다. 여러분들 게젓 사시오. 저 장사야, 네 물건 그것이 무엇이라 외치느냐? 사자. 바깥은 뼈요 안은 살이요, 두 눈은 하늘 향해 있고,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움직이며 작은 다리 여덟 개, 큰 다리가 두 개 달려있고, 싱거운 간장 속에서 아삭아삭 소리내며 씹히는 맛있는 게젓 사시오, 장사야, 매우 복잡하게 외치치 말고 맛있는 게젓이라 말하려무나.

역시 작자 미상의 대화체로 된 게젓장사의 노래다. 물목만 바뀌었을 뿐 구조나 어조 등이 나무장사 노래와 거의 같다. 옛날의 게젓장사는 지금이 반찬가계 장사에 다름 아니다. 한학자의 현학적인 태도를 게젓장수에 비유해 시정의 상거래 장면을 해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쉬운 우리말을 두고 어려운 한자말을 써서 지식을 과시하려는 세태를 풍자하고 있다

중장에서 장사꾼이 한자 어휘를 동원해 ‘게’를 ‘외골내육’이니, ‘양목’이 ‘상천’, ‘전행후행’ 등 장황하게 설명해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여기에다 ‘아스슥’과 같은 의성어로 현장감을 살려주고 있다. 종장에서는 거북하게 한자 어휘로 수다스럽게 말하지 말고 쉬운 우리말로 외치라고 한다. 게젓장수의 현학적인 태도를 익살스럽게 꼬집고 있다.

옛날에는 한문깨나 써야 유식하다는 소리를 듣고 지금은 영어깨나 써야 유식한 말을 듣는다. 우리말이 이리 받치고 저리 받치고 있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당시 만횡청류 장시조들은 반어와 풍자, 익살 등으로 가십이나 만평의 역할을 톡톡히 해낸 셈이다.

이러한 만횡청류의 장시조들은 17세기 후반 상공업의 발달과 함께 생겨나 18세기에 성행했다. 사설시조, 농시조, 엮음시조라고도 하며 작가층은 주로 작가 미상의 평민가객들이었다. 이들에 의해 시조문학은 큰 변화를 맞았고, 만횡청류의 장시조라는 또 하나의 시조의 큰 물줄기가 형성됐다.

저작권자 © 금강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