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호 대전민예총 이사장

얼마 전에 사진작가인 친구의 제안으로 공주에 있는 ‘풀꽃문학관’을 찾았다. 따뜻한 서정을 곱게 간직한 나태주 시인과 정겹게 식사를 하고, 운치 있는 찻집에서 향긋한 차를 나누었다. 훈훈한 마음으로 유성으로 들어서는데 길옆으로 ‘국민적 토론 없는 핵 재처리 실험 반대!’라 적힌 펼침막이 눈에 띄었다. 얼마 전에 상영된 국내 최초 원전 재난 블록버스터 ‘판도라’가 누적 관객 500만 명을 넘기면서 원전사고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진 터라 관심이 갔다. 자연재해가 적어 전국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이 대전이라는 한 친구의 생각에 오히려 울진, 부산, 경주, 영광 등 원전지역 못지않은 방사능 위험지역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얼마 전에 본 충격적인 영상물 ‘대전 판도라’를 소개했더니, 탐사보도의 모범으로 평가받는 독립언론 ‘뉴스타파’의 해당 홈페이지에서 확인해 보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영화 ‘판도라’는 박정우 감독의 말처럼 우리 현실을 90% 이상 반영한 영화로, 영화 속 배경인 ‘한별원전’은 전 세계의 원전단지 중 가장 큰 부산의 고리원자력발전소가 그 모델이다. 영화 속 사고 발생 원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고리1호기’로 현재 39년째 가동 중인데, 다행히도 금년 6월 영구 정지할 예정이다. 그간 고리1호기에서 많은 사고가 있었다. 2012년 작업자의 실수와 기계 고장이 겹쳐 12분 동안 전원의 완전 상실로 원자로가 냉각되지 않으면서, 최악의 경우 후쿠시마와 같은 대형 참사로 이어질 수 있는 아찔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런 대형사고가 한 달여 동안 조직적으로 은폐되다가 한 부산시의원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고, 다음 해에는 제어케이블 시험성적서 위조사실이 확인되기도 했다. 고리원전은 반경 30㎞ 이내에 380만의 시민이 거주하며, 울산석유화학단지와 현대자동차공장 등 핵심 경제시설이 위치해 사고 발생 시 인명과 재산의 피해는 영화보다 훨씬 더 참혹할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의 한 원전전문가는 최악의 경우 2400만 명이 피난 가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하면서, 그런데도 신고리 5·6호기를 추가 증설하는 것은 미친 짓이라고 강력 비판하기도 했다.

‘대전 판도라’는 유성구에 있는 한국원자력연구원이 1987년부터 2013년까지 1699개의 사용후 핵연료봉을 연구와 실험 목적으로 고리원전, 울진원전, 영광원전 등으로부터 운반 보관해 왔음을 고발한다. ‘죽음의 재’로 불리는 폐연료봉은 우라늄과 세슘, 플루토늄 등 방사성 물질을 포함하는 고준위 방사성폐기물인데도 지난 30년간 제대로 된 안전시험도 하지 않은 운반용기로 운송됐다고 한다. 또한 핵발전소에서 주로 고속도로를 통해 이송되는데, 핵연료봉 운반차량의 무게보다 설계하중이 미달하는 교량을 수시로 지나는 등 이런 위험천만한 사실조차 원자력연구원은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방사성폐기물을 쌓아놓은 저장고는 내진설계조차 돼있지 않았고, 원자력연구원이 영광원전이나 울산원전보다 총 방사능 배출량이 더 많았던 기간도 여러 번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대전의 150만 시민이 핵발전소 주민들 못지않게 방사성 물질에 노출돼 온 것이다. 원자력연구원에서 그간 중수누출, 방사성요오드검출, 방사능피폭, 우라늄시료 분실, 방사성폐기물 무단폐기 등 크고 작은 사고들이 빈발했다니, 안전 불감증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다.

문제는 원전 밀집도가 세계 1위인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원전사고 피난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원전 안전 신화가 붕괴되면서 많은 나라가 앞다퉈 탈핵을 선언하며 에너지정책을 전환하고 있는데, 유독 우리나라만은 노후 원전의 수명을 연장하고 신규 원전을 추가 증설하는 등 세계적 추세에 역행하는 기현상을 보여 무척 안타깝다. 더구나 ‘미래형 원자력 시스템 개발’이란 미명하에 원자력연구원에서 준비하는 핵 재처리작업인 ‘파이로 프로세싱’ 공정은 세계적으로 성공한 사례도 없고, 천문학적 비용에 일반 원전보다 훨씬 위험한데도 강행되고 있다. 가히 ‘핵 재앙’이라 할 수 있는 ‘대전 판도라’는 과연 열릴 것인가. 국제환경단체인 그린피스코리아는 이렇게 묻는다. 우리는 정말 이대로 가만히 있어도 괜찮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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