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우 전국공공연구노동조합 전 위원장

마리 퀴리 박사는 잘 알려진 것처럼 노벨물리학상과 노벨화학상을 받은 여성과학자다. 그는 자신의 업적만으로 프랑스의 국립묘지 팡테옹에 묻힌 최초의 여성이다. 그러나 퀴리 박사가 팡테옹으로 이장된 것은 죽고 나서 61년이나 지난 1995년의 일이었다. 그가 살아 있을 때는 폴란드 출신의 이주민 여성이라는 사실 때문에 편견과 차별에 시달려야 했다. 1911년 1월 프랑스 과학아카데미는 퀴리 박사가 노벨물리학상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회원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프랑스뿐만 아니다. 영국 왕립학회도 1945년이 돼서야 처음으로 여성회원을 받아들였다.

이처럼 인권의 선진국이라고 알려진 나라들도 여성 문제에 있어서는 야만적이고 후진적인 시대가 20세기까지 이어져왔다. 그리고 야만의 시대에 변화를 일으키는 일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그것에 맞서는 끈질긴 저항과 처절한 투쟁이 있었다. 1975년에 와서야 유엔(UN)이 뒤늦게 3월 8일을 ‘세계 여성의 날’로 지정한 것도 이러한 투쟁의 결과물인 셈이다.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여성 참정권, 일할 권리, 차별 철폐 등을 외치며 처음으로 세계 여성의 날 집회를 열었던 것은 바로 프랑스 과학아카데미가 퀴리 박사를 거부했던 1911년의 일이었다.

유럽에서 첫 번째 세계 여성의 날 집회가 열리게 된 것은 1908년 3월 8일에 미국의 여성 노동자들이 선포한 첫 번째 전국 여성의 날 투쟁의 영향 때문이었다. 미국 여성 노동자들은 1908년 투쟁에 이어 1909년에 13주 연속 파업 투쟁을 벌였는데 많은 파업 참가자들이 10대였다. 그들은 장시간 노동과 아동노동 금지, 성적 괴롭힘 중단과 여성 참정권 보장을 요구했다. 1910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린 국제 여성노동자회의에서 독일 여성운동가이며 사회주의자인 클라라 제트킨은 뉴욕 여성 노동자들이 투쟁을 시작한 3월 8일을 세계 여성의 날로 정하자고 제안했고 국제 여성노동자회의는 그 제안을 채택한 것이다.

불행하게도 그 직후인 1911년 3월 25일 뉴욕의 트라이앵글 셔츠웨이스트 공장에서 큰 불이 나서 여성 노동자가 123명이나 죽는 참사가 일어났다. 20세기 미국 역사에서 최악의 인재였다. 희생자는 대부분 16살에서 23살의 유대인과 이탈리아인 여성 이민자였다. 공장은 건물의 8층부터 10층까지 있었는데 모든 계단과 비상구가 잠긴 상태에서 대피하지 못하고 갇힌 채 불에 타거나 질식해 죽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몇 번 경험했던 참상이다.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해 8만 명의 노동자들이 비를 뚫고 장례 행진을 했고 그 모습을 25만 명의 시민들이 비장하게 지켜봤다고 한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침묵으로 일관했고 법과 제도는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제임스 오펜하임이라는 시인이 1911년 12월, 이러한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과 죽음을 기리며 “Bread and Roses”(빵과 장미)라는 시를 발표했다. 그 후 “모두에게 빵을 그리고 장미도”라는 구호가 1912년 매사추세츠 로렌스 직물노동자 파업의 전면에 등장했다. 로렌스의 거의 모든 방직공장에서 2만 명의 노동자들이 노동시간 단축, 아동노동 금지, 안전한 노동조건 확보,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였다. 빵과 장미 파업으로 알려진 이 파업은 미국 노동운동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승리로 기록되고 있다.

빵과 장미 파업 이후 105년이 다시 지났다. 세계 여성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생존을 위한 권리로서 ‘빵’과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권리로서 ‘장미’를 쟁취하려고 끊임없이 싸워온 한국 여성들의 현재 모습은 어떨까? 임금 수준은 남성 노동자의 64%, 여성 경제활동지수는 33개국 중 32위, 직장 내 여성차별의 정도를 말하는 유리천장지수는 OECD 꼴찌. 그 어떤 통계지표를 찾아보아도 참담하다.

여성 문제에 관한 한 갈수록 나빠지는 이 나라를 어찌해야 하나? 빵과 장미 투쟁을 남성과 여성이 힘 모아 함께하지 않는 한 갈 길은 아직 멀고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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