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이 정변 실패로 은둔 생활한 곳
기생 명월과의 사랑 이야기가 전해지는 장소

대청호 9구간에서 마주한 청풍정

 

대청호오백리길, 그곳에 가면 : 9 구간 '청풍정'

셰익스피어의 희곡 중 5막 비극인 ‘로미오와 줄리엣’은 듣는 이의 심금을 울린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거다. 죽음마저 초월한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는 누가 봐도 슬프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사랑하는 이야기다. 대청호 주변에도 한 남자를 정말 사랑해 결국 생을 마감한 여인의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희곡이 아니다. 123년 전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1980년 생겨난 대청호는 직접 이 이야기를 보지 못했다. 하지만 깊은 수면 아래 그 이야기를 감추고 있다. 이제 그 이야기를 수면에서 꺼내본다.

 

#. 김옥균의 사랑 서린 ...

이루지 못한 대의와 사랑 이야기
잔잔한 호반 위를 파도되어 일렁
해질녘 풍경은 감성을 파고들고

 

구름이 달빛마저 삼켜 반딧불이만 길을 비추는 숲속에서 여인은 조만간 숨이 멎을 노인네처럼 간신히 남자에게 말을 건넸다. 목소리는 어두운 밤이 무서운 아이처럼 기어들어갔다.

“더 이상 못 가겠습니다.”

남자는 주위를 빙 둘러본 뒤 마음에 걸리는 게 없어졌는지 손을 놓칠까 꽉 쥔 여인의 손을 풀고 자상하게 말했다. 남자는 여인이 찬 바닥에 앉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주변을 둘러보고 적당한 바위로 여인을 안내했다. 그리곤 여인이 바위에 앉을 수 있도록 했다. 계속해서 뛰느라 힘들었는지 여인은 앉자마자 거친 숨을 계속 들이쉬었다. 남자는 그런 여인에게 뭐가 그리 미안한지 눈치를 봤다.

 

 

“명월(明月). 고생했소. 다행히 우릴 뒤쫓는 이들을 따돌린 것 같소. 어디 불편한 곳은 없소?”

달빛을 가렸던 구름이 천천히 걷히더니 명월의 얼굴이 비로소 드러났다. 반달 같은 큰 눈에 작지만 높은 콧대와 물망초 같은 콧방울, 그리고 앵두처럼 새빨간 입술은 경국지색(傾國之色)인 춘추시대의 월(越)나라 출신 서시(西施)가 다시 태어난다 해도 뒤지지 않을 미모였다. 반달 같은 큰 눈이 초승달처럼 바뀌며 명월이 입을 열었다.

“잠시 숨이 찬 것뿐입니다. 쉬다 보면 금방 괜찮아 질 겁니다.”

남자는 명월의 미소를 보자 세상을 다 가진 듯 쫓기는 신세를 잊은 것처럼 호탕하게 웃었다.
“다행이오. 목을 축일 수 있도록 잠시 좀 둘러보고 오겠소.”

잠깐 자리를 비우는 것마저도 불안할 만큼 남자는 차라리 삼보일배(三步一拜)가 나을 정도로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명월을 돌아봤다. 명월은 걱정하지 말라며 가늘고 고운 손을 버들강아지처럼 흔들었다. 고개를 돌리고 한참을 걷자 큰 강이 나왔다. 남자는 주변을 살피고 호박잎을 따 물을 한 움큼 담아 마셨다. 그리고 명월이 마실 물을 뜨고 엄마에게 자랑할 걸 보여주려는 어린아이처럼 환하게 웃으며 달려간다.

“오래 기다렸소. 목 좀 축이시오.”

안 그래도 목이 말랐는지 명월은 호박잎을 앵두 같은 입술로 가져간 뒤 우악스럽게 동네 아저씨처럼 벌컥벌컥 마신다.

“이제 좀 살 것 같습니다. 이젠 밤을 지샐 곳 좀 찾아보시죠.”

 

남자는 명월의 손을 잡고 일으킨 뒤 그녀와 함께 길을 따라 걷는다. 아까는 미처 보지 못했던 아름다운 광경들이 달빛과 함께 장관을 이룬다. 거대함을 어둠 속에 가리고 있었던 강이 달빛을 머금고 잔잔하게 물결을 일으키는 모습이 꽤 장관이었다. 자시(子時·밤 11시부터 새벽 1시 사이)였음에도 강은 하늘처럼 푸르렀다. 저 멀리서 들리는 물이 바위에 부딪히는 소리는 마치 바닷가에 왔을 착각이 들었다. 긴장했던 마음을 충분히 가라앉히기에 충분했다. 이곳에 이처럼 아름다운 곳이 있었나 싶은 마음에 남자는 짧게 탄식을 내질렀다. 이 순간 명월의 아리따운 얼굴을 까먹었던 게 분명하다.

‘개혁이 무슨 소용이랴. 차라리 명월과 함께 이곳에서 조용히 삶을 마감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

그러곤 명월을 지긋이 바라보며 입을 맞추기 위해 한 걸음 다가섰다. 명월은 남자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빙긋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한 발짝 물러서 남자에게 물었다.

“이곳은 어디입니까?”
남자는 입을 맞추지 못해 아쉬운 마음이었지만 입을 얼른 맞추고 싶어서인지 재빨리 대답했다.

“충청도쯤 될 거요. 여기는 금강일 거고.”
“강이요? 큰 호수 같은데요? 그러지 말고 이곳의 이름을 따로 정하시죠. 대청(大靑)이란 이름이 좋을 것 같습니다. 보기도 푸르고 당신이 가진 거대한 청운의 꿈을 재기하기 위한 곳이란 뜻을 담았습니다.”

 

남자가 보기에도 이곳은 너무 청명하고 거대했다. 그리고 그가 가진 꿈을 큰 푸름이라 표현한 것도 마음에 들었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인 뒤 아쉬움을 뒤로한 채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새벽 동이 트고 어딘가 멀리서 수탉의 울음소리가 들릴 때쯤 정자를 발견했다. 이름 모를 누군가 푸른 대청의 풍경을 보며 술을 자시기 위해 지은 것처럼 허름했다. 하지만 따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명월에겐 조금이라도 편히 쉴 수 있는 곳이 필요했다.

“저기 정자가 있소. 그대가 머물기엔 매우 허름하지만 상황이 이러니 잠시 쉬는 게 좋겠소.”
“어디서 쉬는 게 중요하겠습니까. 그저 당신과 쉰다면 아무리 허름한 곳이라도 경복궁이 부럽지 않을 겁니다.”

이름도 없을 법한 정자에 가까이 가니 ‘청풍정(靑風庭)’이란 현판이 있었다. 대청의 시원한 바람을 당당히 맞서듯 다른 곳보다 높은 곳에 있는 청풍정에 오르니 뜻밖의 좋은 풍경을 자랑했다.

어디선가 배를 띄워 유유자적 대나무로 낚시라도 하고 있을 자부선인(紫府仙人)이라도 찾아 앞으로의 일을 상담하고 싶었다.

마루에 앉아보니 정자 밖으로 고개를 내밀기가 무서울 정도로 대청의 거대함이 눈앞에 펼쳐진다. 명월이 지어준 대청이란 이름이 더욱 공감됐다. 대청이 불어주는 바람에 이는 물결소리와 흔들리는 갈대소리까지 더해지니 남자는 이제까지의 근심걱정을 날려버렸다.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은 찰나 명월이 입을 뗀다.

“청(靑)나라의 갑작스러운 공격 때문에 삼일천하(三日天下)로 끝난 겁니다. 그대 때문이 아닙니다. 잡생각은 떨치시고 앞으로 재기하실 생각만 하시죠.”

명월의 말이라면 메주로 팥을 쑨다고 해도 동의할 남자였지만 이 순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옆에 있는 명월의 아름다움과 뛰어난 대청의 절경을 감상하고 싶었는지 한참이 지난 뒤에야 입술을 뗐다.

“한량처럼 생활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 생각하오. 나와 함께 개화당(開化黨)을 연 박영교(朴泳敎), 박영효(朴泳孝), 서광범(徐光範) 동지도 개미새끼마냥 뿔뿔이 흩어진 마당에 무얼 할 수 있겠소.”

 

#. 소설 속 한 장면처럼

 

푸른물 굽이치는 명월암 그 아래
아로새긴 '명월'이란 글자 또렷
개혁가의 감미로운 감정 오롯이

 

남자의 표정은 금세 어두워졌다. 며칠 전만 하더라도 나라를 개혁하겠단 당찬 포부의 남자는 더 이상 없었다. 명월은 여러 차례 남자를 격려했지만 남자는 과거 얘기를 꺼낼수록 더욱 불안했고 미래에 대한 갑갑함이 얼굴에 드러났다. 명월도 포기했는지 남자에게 등을 돌리고 대청을 바라봤다.

 

아직 해가 채 뜨지 않았음에도 대청의 반짝임이 명월의 눈에도 있었다. 무언가를 결심한 명월은 주인에게 한 대 맞아 토라진 강아지처럼 큰 눈으로 남자를 째려보고 안채로 들어가 문을 휙 잠가버렸다.

남자는 시원한 대청의 바람을 맞으며 눈을 감았다. 그렇게 대청의 포근함 속 선잠을 자고 일어나 얼른 명월을 달래주려 했다. 눈을 뜬 남자는 해가 머리 위 높이 뜬 걸 알곤 소스라치게 놀라며 어미젖을 찾는 새끼처럼 본능적으로 명월을 찾았다. 청풍정에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식경(食頃)이 지나도 명월은 돌아오지 않았다. 명월이 두려울까 숨겨뒀던 검은 존재가 남자의 내면을 덮치기 시작했다. 그리곤 신을 얼른 신었다. 청록의 시원함과 대청 바람의 쾌청함이 그를 둘러싸서인지 남자는 걸음을 서둘렀다. 얼마나 걸었을까. 저 멀리 큰 바위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다시 한 번 내면의 검은 존재가 남자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행여나 하는 마음에 한달음에 바위로 올라갔다. 명월에게 선물로 준 꽃신과 명월의 자필로 쓰인 듯한 편지가 있었다. 남자는 직감했다.

자신의 꿈과 모든 걸 뒤로하고 자신을 따라온 명월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 그리고 자신의 무능함과 좌절감 모든 것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한참이나 눈에서 모든 감정을 쏟아내고 편지를 읽었다.

 

 ‘거대한 꿈이 삼일천하로 끝났다고 당신이 꿈을 저버리지 않길 바랍니다. 그대의 동지들이 뿔뿔이 흩어져 제 한 몸 고사하기 힘든 상황에서 명월을 잊지 않고 왔다는 사실만으로 늘 감사할 따름입니다.

당신의 거대한 사랑에 조금이라도 갚고자 먼 길 마다치 않고 그대 하나만을 보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언젠가 그 꿈을 다시 실현시킬 수 있도록 옆에서 그대를 보살피고 또 보살피려 했으나 무기력해지는 모습이 너무 슬펐습니다.

이제 제 한 몸 대청이란 큰 호수이자 당신의 큰 꿈속으로 제 몸을 던지겠습니다. 큰 꿈을 실현시키기 위한 도화선이 되길 바라고 또 바랍니다. 비록 우리는 현세에서 멀어지지만 저 멀리서 당신을 지켜보고 언젠가 오실 것을 준비해 마중 나가겠나이다.’

남자는 다시 한 번 가슴의 울컥함을 토했다. 하지만 아까의 감정과는 다른 이번엔 사나이로서의 감정이다. 이 감정을 다시금 일깨워준 명월을 위해 남자는 이제 다시 일어났다.

막 태어난 송아지처럼 몇 번이나 넘어지고 손과 무릎은 까졌다. 그리곤 바위에 글을 새기기 시작했다. 명월의 사랑을 기억하는 한편 그의 큰 희생을 누군가는 알아줄 것이란 마음이었다.

“명월암(明月巖)이오. 그대의 큰 사랑과 희생 덕분에 이제야 정신을 차릴 수 있게 됐소. 비록 그대는 없지만 지켜봐 주시오. 나 김옥균(金玉均)을.”

김옥균은 대청을 한동안 바라보곤 발걸음을 뗐다. 어젯밤 명월의 눈에도 있었던 대청의 반짝임을 보고선 아까까지 있었던 그 불안함과 갑갑함을 그 거대한 대청으로 날려 보냈다. 대청은 명월처럼 자신의 모든 감정을 다 받아 줄까 하는 마음이었다.

글=김현호 기자 khh0303@ggilbo.com
사진=노승환 기자

 

총평★★★

청풍정에 돗자리를 깔고 앉을 수 있어 편하게 대청호의 절경을 볼 수 있다. 물결이 치는 소리는 흡사 바닷가에 온 착각이 든다. 낚시를 좋아한다면 이곳을 찾는 것도 나쁘지 않다.

배스가 심심찮게 잡혀 낚시꾼 사이에선 꽤 유명하다. 다만 청풍정까지 가는 도로가 협소하고 마땅한 주차시설이 없다는 게 흠이다. 여기에 청풍정까지 가는 200m의 인도는 포장되지 않아 불편하다.

낚시꾼들이 버린 쓰레기도 옥에 티다. 수몰된 과거의 청풍정은 뛰어난 배경을 자랑하며 군북8경 중 하나였다고 하지만 현재는 잠깐 방문해 대청호를 바라볼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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