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회 취재부국장

얼마 전 미국 뉴욕 할렘의 한 공립학교가 ‘한국식 교육’을 접목해 효험을 쏠쏠히 보고 있다는 TV프로그램을 유심히 봤다. 6.25 전란을 관통하며 잿더미 위에서 신화를 일군 힘이 교육이었고 ‘개천에서 용 나게’한 힘 역시 교육이었다는 프레임에 위험한 빈민가 할렘 아이들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담아 녹여냈다. 특히 존중과 배려, 예절 등의 형이상적(形而上的) 가치를 공유한 결과 동기부여가 됐고 실제로 대학진학률이 치솟은 것은 물론 학생들의 태도 또한 달라졌다는 게, 그래서 꿈과 희망을 퍼 올리고 있다는 게 결론이었다.

교육이 대한민국의 밑천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교육을 디딤돌 삼아 급속으로 진화한 유일무이한 나라임에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그러나 어깨를 으쓱해볼 찰나 아둔패기의 걱정이 갈마들었다. 국가의 정력이 신음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면서 그네들이 도입한 한국식 교육은 어쩌면 이젠 이 땅에선 볼 수 없는 그리 오래되지 않은 교육사(敎育史)의 한 지점에서 끄집어 낸 장면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야료라고 반박할지 모르나 ‘개천에서 용 나게’했던 한국식 교육은 영면(永眠)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사교육의 부축을 받지 않는 한 버텨낼 수 없는 환경에서 변변하게 가진 것 없는 집안 아이들이 단지 헝그리 정신에 입각해 과연 공교육만으로 용이 될 수 있느냐는 말이다. 누구나 어려웠던 시절이 아니라 누구나 사교육을 받는, 곳간에서 인재 나오는 시절에 개천의 용트림은 글러먹은 구조다. 마른 개천을 살려보겠다고 이리 뛰고 저리 손쓰는 이들의 안간힘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나라 개천은 더 이상 용을 잉태하지 못하는 불임 상태로 이해되곤 한다.

인성교육 장치들은 어떠한가. 요즘 학교에서 존중과 배려, 예절 따위가 잘 이식되는지 의문이다. 물론 많은 학교가 바른 인성을 심어주기 위한 여러 정책을 구사하며 노력하고 있지만 예전 아이들에 비해 요즘 아이들이 남을 존중하고 배려하며 웃어른을 공경한다고 보기엔 무리다. 되레 이기심만 커져 식성만큼이나 인성이 서양화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선생님 그림자도 밟지 말라고 했는데 선생님 머리 꼭대기에 앉는 분위기다. 되바라진 아이들을 더 이상 보기 힘겨워 수십 년을 봉직한 교단을 몇 년 먼저 떠나는 교사들의 탄식이 생생하다. 교사가 회의를 느끼는 교실이라면 결코 인성교육이 착근돼 있다고 볼 수 없다. 자식 한둘 나아 품에 끼고 사는 요즘 부모들이 바라보는 교사들의 위상 또한 말이 아니다.

돈이 없어도 자강불식(自強不息)으로 제 힘에 돋아나는 교육이 그립다. 차라리 결기에 주먹다짐은 해도 떼구박이 없는 교육이 그립다. 선생님 그림자는 밟아도 교권은 침해하지 않는 교육이 그립다. 그래야 전수에 나선 한국식 교육이 떳떳해진다. 속은 곪았는데 고름이 크림처럼 포장되면 얼마나 창피한 일인가. 내놓는 정책마다 이러구러 학부모 등골 휘게 하고, 흐트러진 밥상머리 교육이 학교교육을 나무라는 현실이라면 ‘죽은 교육의 사회’에 직면할 수도 있다는 아찔한 생각이 든다.

대선을 앞두고 권력을 그러쥐기 위한 본격적인 레이스가 시작됐다. 나름 차림표를 꾸리고 적임자임을 강조하며 어제와 같은 구애를 하고 있다. 좋이 봐 줘도 공약이라는 게 빈 수레와 같아서 믿음을 갖지 못하지만 교육만큼은, 대한민국의 힘만큼은 빈손으로 시작해 지금을 일군 그 시절처럼 ‘개천에서 바른 용 나게’ 해 주길 간절히 바라본다. 그것이 조금이라도 평등해지고, 조금이라도 균형 잡힌 나라의 초석임을 명심하면 답은 보이기 마련이다. ‘메이드 인 코리아’ 중 으뜸은 교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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