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영 작가·대전중구문학회 회장

 

사람이 살아가노라면 주위 사람들한테 신세를 질 수도 있고 반대로 도움을 줄 수도 있다. 이러한 일은 사회 어느 곳에서나 마찬가지다. 그만큼 사람은 환경과 어우러져 살아가는 고차원의 사회성을 갖고 있어서 그렇다. 각계각층의 많은 사람과 접촉하면서 신세를 지고 살아간다는 건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니다. 자신의 역량으로 헤쳐 나가기에는 힘든 일을 주위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아 해결하며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뜨거운 피가 흐르는 우리 인간만이 지닌 풋풋한 인지상정일 것이다.

그러나 주위에는 의도적으로 상대방에게 신세를 지는 사람도 있다. 그 의도적인 신세가 도처에서 횟수가 많아진다면 이는 문제 있는 사람이요, 문제 있는 사회다. 누군가와 만나 식사를 대접하기보다는 대접받기를 원하고, 술을 사 주기보다는 얻어먹기를 원하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기보다는 외면을 하는 사람들이 주위에는 생각보다 많다. 반대로 식사를 한 번 대접 받으면 이쪽에서 두 번 대접을 하고, 술을 한두 번 대접받으면 이쪽에서 두세 번 사 주고, 상대방에게 피해를 끼치기보다는 온정과 덕을 주는 사람들이 있다.

전자(前者)를 ‘51인생’이라 하고 후자(後者)를 ‘49인생’이라 하자. 요컨대 상대방에게 주로 얻어먹는 51인생은 한마디로 ‘남는 사교’에 능한 사람이요, 비교적 상대방한테 주기를 좋아하는 49인생은 ‘밑지는 사교’에 익숙한 사람이다. 사람들 중에 과연 51인생은 얼마나 되고 49인생은 얼마나 될까? 가만히 주위를 되돌아보자. 49인생보다 51인생이 더 많은 것 같다. 좀 더 벌어 부를 축적해 잘살기 위해서, 자신의 능력 이상으로 출세하기 위해서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위와 앞만 바라보며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 게 오늘날 현대 생활의 한 단면이다.

그런데 남는 사교에 익숙한 51인생의 분포가 웬만큼 살 만한 고위 인사 계층에 많이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오히려 사는 정도가 어려운 서민들에게 49인생이 더 많다. 추운 겨울날 도심 도로변에 엎드려 구걸을 하는 걸인에게 동전을 내미는 사람들 중에는 49인생인 이들이 많음을 볼 수 있다. 동병상련이라 했던가. 가난의 고통과 불편함을 몸소 겪는 그들이기에 불우한 이웃의 고충을 헤아릴 수 있는 것이다. 남에게 주는 일이란 쉬운 일도 아니지만 또한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리고 가진 자만이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없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은 더욱 아니다. 중요한 것은 평소 일상생활 속에서 선한 마음을 얼마나 지니고 살며 실천에 얼마나 옮길 수 있느냐인 것이다. 그러나 가진 것이 없는 자의 마음에서 대개 훈훈한 인정의 꽃이 피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간과 할 일이 아닌 듯싶다.

요즘 조간신문을 펼쳐 들면 1면에 대형사건, 사고 기사들이 눈을 부릅뜬 채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이러한 기사들을 보면서 어쩌려고 이러는가? 이래도 되는 것인가? 하고 자문하게 된다. 살인, 강도, 폭력 사건들도 사실 따지고 보면 51인생이 도처에 득세하고 그 도가 넘쳐 생기는 사회 병리 현상이다. 그저 남에게 조금은 ‘밑지는 듯한’ 처신으로 사는 49인생이 우리 사회 저변에 만연하다면 과연 흉칙한 사건, 사고들이 생길까? 어떻게 하면 상대방에게 얻어먹고, 어떻게 하면 상대방을 적당히 속여 자신의 입지를 높힐까를 궁리하는 51인생이 많으면 많을수록 사회 병리도 깊어 갈 것이다. 반대로 조금 밑지는 듯한 처신을 하는 49인생이 많으면 많을수록 인심도 훈훈해지고 인정과 인덕의 폭죽이 터지는 살 만한 세상이 될 것이다.

우리 인간은 우주의 나그네다. 지구라는 땅덩이 위를 기껏 100년도 안 되는 짧은 세월을 걷다가 결국 남는 것은 오로지 한 줌의 흙일뿐이다. 이까짓 짧은 세월 살면서 조금은 밑지는 듯한 49인생으로 유유히 관조하며 여유 있게 살다가 홀연히 떠나는 나그네 인생이 정녕 훈훈하며 살 만한 소풍 나들이 같은 여정이 아니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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