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부대 교수

 

송시열의 ‘님이 헤오시매’

임이 헤오시매 나는 전혀 믿었더니
날 사랑하던 정을 뉘 손에 옮기신고
처음에 뮈시던 것이면 이대도록 설우랴

임금에게 내침을 받은 그때의 심경을 노래한 시조다. 옛날 효종 임금께서 이조 판서를 제수할 때 허름한 옷을 입은 우암에게 담비 가죽 털옷을 하사했다. 임금님의 옛정이 그리워 외로이 눈물을 흘리고 있을 만년 우암의 모습이 떠오른다.

임께서 특별히 생각하시므로 나는 전적으로 믿었었는데, 그 정을 누구에게 옮기셨는지, 애당초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셨더라면 이렇게까지 설워했겠는가. 사랑했다가 배신을 당했다면 얼마나 마음이 아플 것인가. 누구나 원망하고 싶었을 것이다. 여러 번 벼슬에서 물러나고 유배를 갔던 우암이었으니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본관은 은진, 호는 우암이다. 사계 김장생의 제자로 인조 11년 사마시에 장원 급제, 뒤에 봉림대군의 사부가 됐다. 병자호란 때는 왕을 호종해 남한산성으로 피난했다. 효종이 즉위하자 이조 판서가 돼 효종의 북벌 계획에 참여했으나 왕의 죽음으로 그만 무산되고 말았다. 송시열은 해마다 임금의 제삿날이 되면 하사받은 털옷을 보면서 슬퍼했다고 한다. 우암은 노론의 영수로 늘 당쟁의 한가운데 있었다.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 원자(경종)의 책봉에 반대한 죄로 우암은 제주도 유배길에 올랐다. 풍랑이 심해지자 잠시 머물 곳을 찾았다. 보길도의 선백도 마을 바닷가였다. 겨울이라 바닷바람은 차갑기만 했다. 임금에 대한 서운함과 그리움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이에 시 한 수를 읊었다. 보길도의 선백도 마을 해변의 아름다운 암벽에 자신의 ‘탄시’ 한 수를 새겼다. 보길도는 우암의 영원한 라이벌인 남인의 영수, 고산 윤선도의 땅이었다.

여든 셋 늙은 몸이 푸른 바다 한 가운데 떠있구나
한마디 말이 무슨 큰 죄일까 세 번이나 쫓겨난 이도 또한 힘들었으리
대궐 계신 님을 속절없이 우러르며 다만 남녘 바다의 순풍만 믿을 밖에
담비갖옷 내리신 옛 은혜 있으니 감격하여 외로운 충정으로 흐느끼네

八十三歲翁 蒼波萬里中
一言胡大罪 三黜亦云窮
北極空瞻日 南溟但信風
貂裘舊恩在 感激泣孤衷

-우암 송시열의 ‘암각시문’

조선시대의 두 논객, 남인과 서인의 영수가 이 남도의 먼 끝 보길도에서 만난 것이다. 그는 죽음을 예감했을까. 서울로 압송되던 도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16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신원됐으며 시호는 문정, 주자학의 대학자로 ‘송자대전’을 남겼다. 그는 재야에 있으면서도 여론을 주도, 많은 사람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끼친 인물이다. 특히 예론에 밝았으며 그의 문하에서 많은 인재들이 배출돼 기호학파의 학풍을 이아갔다. 사람들은 그를 송자라 불렀다. 문묘·효종묘를 비롯해 청주의 화양서원, 여주의 대로사, 수원의 매곡서원 등 많은 서원에 배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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