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우 전국공공연구노동조합 전 위원장

1960년 4월 26일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했다.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고 했다. 그날 즉시 국회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은 즉시 하야하고 3·15 부정선거는 재선거를 실시한다’는 시국 수습 결의안을 처리했다. 이승만 씨는 다음 날 국회에 사임서를 내고 대통령직을 떠났다. 그리고 제2공화국은 출범했다. 서울에서만 130여 명이 죽고 1000여 명이 다친 4·19 혁명이 이룬 성과다.

혁명은 1년 만에 역풍을 맞았다. 1961년 5월 박정희 육군 소장이 중심이 돼 5·16 쿠데타를 일으켰고 민주화를 향한 열망은 허망하게 짓밟혔다. 박정희 씨가 1979년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맞아 죽을 때까지 민주화를 외치던 수많은 종교인, 지식인, 학생들이 감옥에 갇혔고 심지어 사형을 당하기도 했다. 박정희 씨가 죽자 민주화의 열기는 폭발적으로 분출됐고 1980년 한때 ‘서울의 봄’을 맞기도 했다.

그러나 1980년 5월 광주민주항쟁을 총칼로 진압하고 전두환 씨가 군사독재를 이어갔다. 그는 수많은 학생을 강제 징집하고 죽음으로 내몰았다. 1987년 6월 10일 전두환 씨가 육사 동기인 노태우 씨를 집권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로 내세우자 국민들이 일제히 거리로 뛰쳐나왔다. 1987년 6월 항쟁의 요구는 독재 타도와 호헌 철폐였다. 거센 저항에 밀려 노태우 씨는 이른바 6·29 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하겠다고 했다. 그해 12월에 치른 13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김영삼 후보와 3파전을 벌인 노태우 씨가 36%의 득표로 대통령이 되고 말았다.

1997년 대통령 선거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비로소 야당으로의 정권 교체를 경험하게 된다. 그렇지만 IMF 환란을 당해 경제는 파탄 지경에 놓였고 김대중 정권은 정치·경제적 민주화보다는 노동자 서민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경제 위기를 돌파하려고 했다. 정리해고와 근로자 파견을 합법화했던 것이 김대중 정권의 일이었다. 뒤를 이은 노무현 대통령은 탈권위주의적 행보에도 불구하고 한미FTA 강행, 이라크 파병, 비정규직법 개악 등으로 또다시 저항에 직면했다.

정권교체에도 불구하고 사회양극화가 극심해지자 경제를 살릴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로 이명박, 박근혜 씨가 연달아 대통령이 됐다. 그 결과는 수십조 원의 혈세를 들여 4대강을 죽음의 강으로 만들고 메르스와 세월호 사건처럼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도외시하고 비선 세력들과 국정을 사유화한 것으로 나타났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69년이 지났건만 국민 모두가 한마음으로 기억하고 존경할 수 있는 대통령을 갖지 못했다.

스스로 물러나기를 거부하고 한사코 버티던 현직 대통령을 파면하고 구속하게 만든 것은 국민의 힘이다. 그러기에 2016년 11월 촛불시민혁명은 세계가 찬사를 보낼 만큼 역동적이고 아름답고 평화로운 혁명임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모든 것은 현재 진행형일 뿐이다. 19대 대선을 통해서 새로 대통령을 뽑으면 무엇이 달라질까? 국민에 대한 대통령의 마음가짐도 달라질 수 있고 비선 실세도 사라질 수는 있겠다.

그렇지만 헌법에 의해 대통령에게 집중된 권력은 여전히 막강하다. 대통령의 독단과 비선 세력들의 농단 앞에서 찍 소리도 못하던 관료들도 그대로 있다. 골목상권까지 다 먹어치우는 재벌들의 탐욕도 그대로다. 이런 체제에서는 선거가 끝나면 대통령은 필연 절대 권력을 가진 통치자가 될 뿐이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선 촛불을 든 마음으로 결연하게 요구해야 한다. 인물이나 장밋빛 공약에 현혹되지 말고 하나라도 촛불시민의 이름으로 요구하고 관철해야 한다. 무엇보다 정부의 주요 정책 결정과 추진 과정에서 촛불시민혁명을 이끈 국민들의 참여를 제도적으로 보장해야 한다. 이런 걸 대신 하라고 국회의원들이 있다고? 선거 때만 읍소하고 4년 내내 제 멋대로 행세하는 국회의원을 파면할 수 있는 권리를 국민에게 주고 나서 그렇게 말하라고 전해라.

저작권자 © 금강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