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암 행정학 박사

인간은 밥을 먹고 만들어진 힘으로 일을 한다. 과거 가난한 시절에는 밥을 통해 생긴 에너지가 자신과 가족을 먹일 수 있는 생산 활동을 하기에도 부족했다. 잉여 에너지가 없으니 축적을 위한 어떠한 활동도 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또 다른 가족의 구성원들이 가장인 아버지를 대신해 축적을 위한 생산 활동을 보충해야 했다. 그래서 아이들은 학교가 끝나자마자 들로 산으로 자신의 역할을 찾아 헤매고 다녔다.

그런데 지금 우리 대한민국의 상황은 다르다. 비록 상대적이긴 하지만 과학과 기술의 발전으로 웬만한 가장의 생산량은 자신과 가족을 먹이고 남을 만큼 늘어났다. 여기에 아내의 생산 활동이 더해져 밥 굶은 걱정은 안 해도 된다. 아이들은 먹을 것을 벌기 위해 방과 후 들로 산으로 가서 생산물을 획득하지 않아도 된다. 이들은 살이 쪄 삐져나올 정도로 충분히 먹을 수 있으며, 부모의 보호 아래 작은 황제가 되었다. 아이들은 과거처럼 자신이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분명한 역할을 해야 하며, 나아가 주변 사람들과의 원만한 거래를 통해 가족에 보탬이 되어야 함을 모른다.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부모들이 척척 알아서 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요즘 아이들은 남아도는 힘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를 모른다. 부모들이 힘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지 않고 오로지 경쟁만을 위해 몰입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부모의 눈치를 보며 남아도는 힘을 오로지 자신과 자신의 세계만을 구축하는 데 사용한다. ‘왕따’와 ‘집단폭행’이라는 심각한 범죄행위는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왕따’란 집단 따돌림 또는 집단 괴롭힘이라는 말로서 여러 사람이 작당을 하고 한 사람을 괴롭히는 행동이다. ‘왕(王) 따돌림’의 준말인 ‘왕따’라는 용어는 1997년 당시 잇따른 학교폭력과 관련해 언론이 대대적으로 보도를 하면서부터 대중적으로 정착됐다. 학생들의 은어인 왕따는 일본의 이지메(いじめ)와도 맥을 같이한다. 왕따로부터 시작된 집단 따돌림은 은따(은근한 따돌림), 전따(전교적인 따돌림), 반따(반에서의 따돌림), 뚱따(뚱뚱한 사람을 따돌림) 등으로 세분화됐다. 이전에는 한국전쟁 때 지뢰를 밟아 다리가 잘린 사람을 ‘찐따’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찌질이 왕따’가 된 듯하다.

어쨌든 왕따를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왕따로 인한 심리적 육체적 괴로움을 모른다. 특히 정서적으로 예민하고 인지 발달이 미숙한 초등학생이나 청소년들의 경우 왕따를 당하면 자아에 큰 상처가 생겨 극단적으로는 자살까지 한다. 어린 시절 왕따로 인해 상처를 받은 사람 중 일부는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고 과거의 기억에 갇혀 죽을 때까지 불행한 인생을 살기도 한다.

과거 못 먹고, 못 살던 시절에는 심각하지 않았던 왕따가 먹고 살만해진 요즘 극성을 부리고 있다. 그렇다면 왕따도 선진국병이란 말인가. 자신의 역할을 모르고 책임질 줄 모르는 잉여인간들이 풍족하게 남아도는 에너지를 잘못된 방향으로 발산한 결과가 ‘왕따’라면 그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아무 일도 시키지 않으면서 하나뿐인 아이를 소황제(小皇帝)로 모시며 최고로 떠받드는 부모와 조부모 덕분에 아이들은 가정에서 자신의 역할과 책임이 무엇인지 모른다. 올바른 가치관과 정서, 올바른 인격과 자아 형성을 위해 힘써 가르치지 않고 오로지 경쟁만 부추기는 사회 풍토에도 면죄부는 줄 수 없다.

이유야 어찌됐든 왕따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고 천진난만한 영혼을 영원히 죽이는 심각한 범죄행위다. 철없는 자녀들 사이에서 무분별하게 벌어지는 왕따를 그대로 내버려뒀다가는 미래의 동량(棟樑)이 될 수많은 아이들을 만신창이로 만들 것이다. 당신의 자녀가 왕따의 주범일 수도 있다는 생각, 당신의 자녀로 인해 다른 자녀의 소중한 영혼이 병들고 있다는 생각을 한 번쯤 해보는 것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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