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형직 을지대학교 교목

주형직 을지대학교 교목

베트남의 하노이를 소개하는 TV프로그램을 본 일이 있다. TV화면은 여러 가지를 담았지만 인상적인 것은 시내를 가득 메운 오토바이였다. 각종 차량과 얽혀 복잡해 보였는데 도로표지도 엉망이고 바닥에 차선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 많은 오토바이가 좁은 틈 사이를 비집고 다니며 질서를 유지했다. 위험해 보였지만 의외로 그렇지 않다고 한다. 오랜 세월동안 그 땅을 지켜온 사람들의 문화적 약속이 만들어낸 질서가 안전을 담보하고 있는 것이다.

동양의 질서 개념은 서양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서양의 질서 개념이 ‘구분’이라면, 동양의 질서 개념은 ‘조화’다. 도로에 줄을 긋고 이쪽저쪽을 구분하며 네 것과 내 것을 엄격히 나누는 것은 서양의 방식이다. 반면 동양의 질서는 우주원리로 삼고 있는 음양오행에서 비롯되는데 상호 간의 밀접한 연관성을 강조한다. 음양은 조화의 이치를 말하고, 오행은 질서의 이치를 설명한다. 음양과 오행은 서로 구분되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이며 어우러지는 것이다. 그것이 동양의 질서 개념이다.

16세기 이후 유럽 열강들의 식민지 건설 경쟁으로 아시아 대다수 나라가 식민지가 됐다. 서양인의 눈에 이들 국가의 조화로움은 무질서로 보였고 미개한 민족으로 인식됐다. 도로를 확장하고 선을 그어 이쪽과 저쪽을 구분하며 나누기 시작했다. 너와 나를 구분하면서 네 것과 내 것이 생겨나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자기 몫에 대한 욕구가 강해지게 됐고 이러한 소유 개념은 본능적 이기심과 욕심을 자극하게 됐다. 갈등과 경쟁의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 것이다.

개화 초기 서양의 합리주의와 과학적 방법론의 눈을 뜬 우리 사회의 지식인들은 암울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무비판적으로 서양문명을 받아들였다. 선을 긋고, 이쪽과 저쪽을 구분했다. 나누고 구분하는 것은 사물을 이해하는 데 합리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이지만 조화와 협력이 수반돼야 온전해지는 것이다. 문제는 그것을 제대로 감당할 여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다. 나누고 구분함으로써 사회발전의 획기적 전환을 이뤘지만 동시에 다른 것을 포용하고 조화해야 하는 과제도 안게 된 것이다.

해방 이후의 혼란과 한국전쟁, 그리고 군사정부가 들어서면서 획일적 사상이 더욱 강요됐다. 서양문명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발전시킬 여유보다는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에 반공을 토대로 한 자유경제발전이 강조됐다. 기술발전과 눈부신 성장에 따른 그늘도 만만치 않게 됐다. 산업화를 거쳐 민주화를 이뤄냈지만 갈등은 깊어졌다. IMF 금융위기를 지나면서 삶은 더욱 각박해지기 시작했고 신자유주의의 등장으로 양극화 현상은 극심해졌다.

사는 것이 힘들어지면서 억울함과 분노가 사회를 지배하고 갑의 횡포와 을의 저항이 충돌하게 됐다. 세대와 신분, 성별, 지역에 따라 나누고 갈등하며 대립하게 된 것이다. 광화문과 서울시청 앞에 쏟아진 시민들의 목소리는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갈등을 상징한다. 시민들의 평화적인 촛불혁명은 세계가 놀랄 만한 역사적 결과를 이뤄냈지만 동시에 사회위기로 인식한 기성세대는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나왔다. 우리 사회가 사회갈등을 해결해야 하는 커다란 숙제를 안게 된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보수와 진보의 갈등 같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다양한 요소가 혼재돼 있다. 사회 불평등과 청년취업, 교육과 육아, 의료와 노인복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회 불만이 표출된 것이다. 이것이 세대와 이념, 지역, 정파에 따라 복합적 갈등양상으로 번지고 있는 것이다. 현재 우리의 사회갈등관리지수는 OECD 국가 중 최하위권이며 매우 심각한 상태다. 대선을 앞둔 후보들은 이 모든 갈등을 해결할 수 있다고 자신하지만 기대하기 어렵다.

자신의 관점에서 상대를 구분하고 나누는 선긋기부터 멈춰야 한다. 전통적 유산이었던 조화로운 질서를 회복해야 한다. 긍정적인 것은 물론 부정적인 것조차 삶과 조화시키려 노력했던 선진들에게 배워야 한다. 극단적인 갈등과 대립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경우는 없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맞섰던 해결방법은 감정적으로는 시원할 수 있지만 더 큰 갈등의 씨앗의 된다. 극단적인 선택은 승자와 패자로 구분할 수밖에 없고 결국 갈등이 폭발해 승부를 겨뤄야만 끝이 난다. 그렇지만 누구도 승리자가 될 수 없는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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