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회 취재부국장

몇 끼를 주린 이에게 자장면 한 그릇이 곡기 채운 이에게 탕수육 한 그릇보다 훨씬 절실한 법이다. 인간의 간절함은 자신이 처지가 바닥에 가까울수록 부풀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간절함은 있다. 다만 못 가진 데 대한 간절함인지, 덜 가진 데 대한 간절함인지의 차이고 상대성의 차이일 뿐이다. 합격, 승진, 건강, 돈 따위의 인간이라면 누구나 추구하는 보편적 바람부터 못 오를 나무를 그저 바라보는 상실의 바람까지 분명 간절함의 결은 다르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고 간절하면 통한다고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더욱이 차별이나 장벽의 족쇄를 찬 간절함이라면 애면글면 해봐야 도리 없다.

가난에 볼모잡힌 이에겐 한 숨 축일 정도의 돈이라도 간절할 것이고 달리 기댈 곳 없는 노년은 사회적 보호막이 간절할 것이며 장애라는 이름으로 온갖 편견과 불편의 굴레를 쓴 이들에겐 평등과 배려가 간절할 것이다. 등록금 부담에 짓눌린 대학생은 ‘반값’이라도 간절할 것이고 3포니, 7포니 시대가 켜켜이 퍼질러놓은 수렁에 빠진 청춘은 포기한 그것이 간절한 것이며 학연·지연·혈연 별 볼 일 없는 갑남을녀는 능력 중심 사회가 간절할 것이다. 집 없는 서민들에겐 착한 집값이 간절할 것이고 남존여비라는 고릿적 오라에 묶인 여성들에겐 성 평등이 간절할 것이며 양육부담에 출산을 주저하는 이들에겐 아이 낳기 좋은 세상이 간절할 것이다. 일용직 노동자에게는 안정적인 일감이 간절할 것이고 비정규직 노동자는 정규직 전환이 간절할 것이며 자금난에 허덕이는 중소기업인에게는 낮은 금융 문턱이 간절할 것이다.

이 땅의 우리는 이처럼 수십만, 수백만 가지의 간절함을 고이 삭이거나 의미 없이 토하면서 산다. 각자도생으로 매듭을 풀 수 있는 간절함이야 개인의 역량과 운에 맡길 문제지만 국정의 오작동이나 사회에 굳은살 박인 차별과 장벽이 잉태한 간절함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때 비빌 언덕이 국가다. 국가가 잡아줘야 할 손이 너무도 많다. 신께서 너무 바빠 어머니라는 대리인을 보냈다면 한 나라엔 대통령을 보내지 않겠는가. 타이밍은 좋다. 5월 9일 대선을 앞두고 후보들이 내놓은 공약이 죄다 누군가의 ‘간절함’과 맞닿는다. 누가 권좌에 앉더라도 후회 없는 선택이 될 것처럼 말이다. 이들은 청년을 말하고 노인을 말하고, 일자리를 말하고 비정규직을 말한다. 교육을 말하고 복지를 말하고 경제를 말하고 보다 나은 삶을 말한다. 적어도 아린 곳이 어디인지는 어림짐작한 듯해 기특하지만 실천이 관건이다. 과연 국고가 감당할 수 있을까 싶은 걱정이 크다. 설령 곳간이 견뎌낸다 하더라도 제대로 된 처방이 나올지 의문이다. 성에 차지 않더라도 이번만큼은 구두선(口頭禪)에 그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어떤 이들의 처연한 간절함에 덧대진다.

간절함은 겪어본 사람이어야 헤아릴 수 있다. 배를 곯아본 사람이어야 허기의 무게를 알고 아파본 사람이어야 통증의 깊이를 알고 늙은 사람이어야 늙어가는 서러움을 아는 식이다.

어떤 위정자도 지천으로 널린 간절함의 맨살까지 마주해 봤을 리 만무하다. 어떤 정치도 모두를 만족시킬 순 없다. 이를 바라는 것 자체가 무리다. 흔하디흔한 경청과 소통의 자세면 그만이다. 완치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간절한 입장에서 역지사지로 이해하려는 일꾼들을 곁에 둬 진맥이라도 제대로 짚어 볼 수 있다면 그래서 조금 덜 간절하게 토닥여줄 수 있다면 성군(聖君)소리 들을 만하다.

요즘 부쩍 ‘누굴 찍어야 하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역대 어느 선거에서와는 질감이 다르게 느껴지는, 우리 정치의 현실을 바라보는 유권자의 고뇌가 읽혀진다. 전들 알겠습니까? 신께서 한껏 상처 받은 국민들에게 어떤 대통령을 점지할지 알 수 없다. 민심이 천심이라고 했으니 민심이 알 일이다. 간절함이 닿는 그곳을 민심이 주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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