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행우주가 존재한다면 랄프 로렌은 이런 삶을…"
"평행우주가 존재한다면 랄프 로렌은 이런 삶을…"
  • 주홍철
  • 승인 2017.05.21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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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행우주가 존재한다면 랄프 로렌은 이런 삶을…"

스물여덟 살의 뉴욕대 물리학과 대학원생 종수는 지도교수인 미츠오 기쿠에게서 사실상 학교를 그만두라는 얘기를 듣는다. 종수는 9년 간의 유학생활이 실패로 돌아간 그날 숙소로 돌아가 술을 진탕 마시고 우편물 따위를 모아놓은 서랍을 발견한다. 몇 년 전 받은 청첩장에서 10년 전 기억을 떠올린다.

결혼을 알려온 수영은 고교 시절 랄프 로렌에게 쓸 편지를 영어로 옮겨달라고 종수에게 부탁했다. 수영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랄프 로렌으로 꾸미고 싶었다. 하지만 랄프 로렌 컬렉션에는 단 한가지, 시계가 없었다. 수영은 랄프 로렌에게 시계를 만들어달라는 편지를 보낼 작정이었다.

학교를 그만둔 종수는 랄프 로렌이 남긴 기록과 주변 인물들을 통해 유독 시계만 생산하지 않은 이유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손보미(37)의 장편소설 '디어 랄프 로렌'(문학동네)은 초반부에서 의류 브랜드 '폴로'를 창업한 랄프 로렌의 일대기, 또는 그의 비밀을 파헤치는 여정을 기대하게 만든다.

구두닦이 소년 랄프 로렌을 데려와 아들처럼 키웠던 조셉 프랭클, 그와 권투시합을 벌였던 조셉 카터, 그의 아들 헨리 카터, 조셉 프랭클의 이웃이었던 100살 넘은 할머니 레이철 잭슨 등 수십 명의 외국인이 랄프 로렌에 대해 진술한다. 조셉 프랭클이 스위스 제네바의 시계학교 출신 시계공이었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종수의 추리에 본격 속도가 붙는 듯도 보인다.

"그 당시 내가 밤마다 녹음해온 잭슨 여사의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었던 건, 순전히 랄프 로렌과 '관련된' 실마리(그것이 티끌만한 것이라고 해도)를 찾으려는 의도였지, 조셉 프랭클의 삶에 대한 순수한 관심 때문은 아니었던 것이다."(204쪽)

조셉 프랭클과 관계맺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계속되면서 여러 평범한 인물들의 삶과 기억이 랄프 로렌의 존재감을 대신한다. 대단할 것 없는 종수와 외국인들의 대화에 귀기울이다보면 랄프 로렌이 왜 시계를 만들지 않았는지에 대한 궁금증도 어느새 잊게 된다.

종수 역시 1년간 랄프 로렌의 비밀을 추적하면서 새로운 세계와 조금씩 조우한다. 잭슨 여사를 자주 찾아가다가 그의 입주 간호사, 그러니까 랄프 로렌과는 세 단계의 인연으로 연결된 섀넌 헤이스와 데이트도 한다. 10년 전에는 아무런 의미 없는 관용적 표현이라며 반대했던 편지의 첫 문장 '디어 랄프 로렌'도 새롭게 다가온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편지가 완성되었든 그렇지 않았든, 그 편지의 가장 첫 문장은 온전히 수영의 문장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 문장은 이 세상 그 어떤 문장보다도 진실되었다는 점이다."(352쪽)

"조셉이 일기에서 훌륭한 장인이 될 수 없다고 비난한 사람들도 자기 자리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었죠.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에게도 그의 인생이 있어요. 종수도 1년 동안의 이야기를 다 하고 난 뒤에야 새로운 무언가를 떠올리게 돼요. '디어'라는 말의 의미를 새롭게 깨닫는 것처럼 소소한 순간들이 모이면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외국 인명과 외래어를 즐겨 쓰고 번역소설을 연상시키는 작가 특유의 스타일은 여전하다. 건조한 문체에, 랄프 로렌의 '생전' 언론 기사 등 사실이라고 믿을 만한 장치들을 곳곳에 배치해 허구와 현실 사이에 선 독자를 혼란에 빠뜨리기도 한다. (1939년생인 실제 인물 랄프 로렌은 아직 생존해 있다.) 지도교수 미츠오 기쿠는 일본계 미국인 물리학자 미치오 카쿠(加來道雄)에게서 이름을 빌려왔고 섀넌 헤이스는 논픽션 작가 빌 헤이스의 누나 이름이다.

"평행우주가 있다면 다른 우주에서는 랄프 로렌이 그런 삶을 살았고 다른 인물들도 실제로 존재한다고 독자들이 생각하면 좋겠어요. 소설은 기본적으로 허구의 세계지만 소설 속 인물이 아닌 실제 인물의 삶으로 읽었으면 해요. 기사 같은 장치에 그런 효과가 있는 것 같아요."

2009년 등단 이후 젊은작가상 대상, 한국일보문학상 등을 수상하며 주목받아온 작가의 첫 장편이다. 계간 문학동네에 2015년 여름부터 지난해 봄까지 연재됐다. "단편보다는 인물에게 선택권을 줄 수 있는 경우가 많고 인물에 대해 하고 싶은만큼 얘기할 수 있었어요. 단편보다는 감정을 더 많이 드러내고 유머러스한 기분으로 쓴 부분도 많고요. 독자가 재밌게, 공감하며 읽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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