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은 자연을 사랑하며 자연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기를 좋아했다. 따라서 하늘과 땅의 신에게 나라의 유명한 명산대천에 국가적 제의를 했다. 기록에 의하면 신라시대 5악(5嶽·계룡산, 토함산, 태백산, 지리산, 팔공산)을 중요시했고 고려시대까지 이어져 내려왔다. 조선시대에는 묘향산에 상악단, 계룡산에 중악단, 지리산에 하악단을 설치해 제천의식을 했지만 현재는 계룡산 신원사의 중악단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계룡산의 유래를 살펴보면 꼭대기인 상봉을 에워싼 쌀개봉과 연천봉을 이은 능선의 모양이 닭(鷄)의 벼슬과 같이 생겼으며 어우러진 봉우리들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용(龍)의 모습과 같다고 해 계룡산(鷄龍山)이라 불리게 됐다. 또 풍수적 관점으로 산세가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금닭이 알을 품는 형세)이면서 유룡농주형(遊龍弄珠形·용이 구슬을 희롱하는 형세)을 함께 갖췄다고 해 지어졌다고도 한다.

동양철학에서 닭과 용이 뜻하는 의미는 특별하다. 닭은 12개의 상징적 동물 가운데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신과 인간의 중간 매개체로서 신성시됐으며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상징이다. 용은 상상의 동물로 몸은 거대한 뱀의 형상이며 네 개의 발은 독수리를 , 뿔은 사슴, 귀는 소를 닮았다. 깊은 못이나 호수, 강, 바다 등 물속에서 사는데 이무기가 됐다가 때로는 하늘로 올라가 승천해 바람과 구름을 일으키는 상서로움을 대표한다. 이처럼 계룡산은 신비로우면서 강력한 운기를 품고 있는 지세로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명산 가운데 으뜸임에는 틀림이 없다.

조선의 태조인 이성계가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큰 뜻을 품은 계룡산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기득권세력의 반대로 결국 무산돼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 후 도참설 및 민간 비결에 의해 계룡산은 이(李)씨의 터가 아니라 정(鄭)씨의 터로 800년의 도읍이 된다는 정감록 사상을 이루게 된다. 정감록의 태두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조선 초기에 개국 공신인 정도전의 민본사상을 기초로 한다는 내용과 중기 이후 국가의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지 못하는 기득권 세력에 반대하는 백성들에 의해 나타났다는 설이 있다.

정도전이 꿈꿔 온 세상은 어떤 것일까? 그가 이상으로 생각하는 정치제도는 재상을 최고실권자로 해 권력과 직분이 분화된 합리적인 관료지배체제이며 그 통치권이 백성을 위해 기능할 수 있어야 한다는 민본사상을 강조한다. 통치자가 민심을 잃었을 때에는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교체될 수 있음으로 고려에서 조선의 왕조로 교체를 수행했다. 이는 당시에는 있을 수 없는 파격적인 정치 제도로 왕이 최고 권력의 중심이 아니라 백성이 중심이 되며 백성을 위한 정치 실현을 위해 백성들 가운데 훌륭한 지도자가 나라를 이끌어 가는 형태의 국가를 말한다. 하지만 태종 이방원에 의해 정도전이 제거됨으로 그 이상 세계는 빛을 잃었고 후일 그의 사상을 그리워하는 백성들이 이씨가 아닌 정씨의 왕국을 꿈꿨다. 조선 중기이후 전쟁으로 인한 국론분열과 백성들의 궁핍과 기득권 세력에 대한 반감이 쌓여 정감록 비결이 계룡산을 중심으로 나타나게 됐다는 것이다. 정도전의 민본사상이 일찍이 정착됐다면 우리의 역사는 많이 달라졌으리라.

정도령의 뜻이 정씨인 사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정(鄭)의 파자(破字·글자를 나누다)로 해석되기도 한다. 정(鄭)을 여덟 팔(八)과 닭 유(酉), 큰 대(大), 도읍 읍(⻏)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때 팔은 팔백년을 뜻하며 닭은 계룡산을 뜻하고 대는 큼을 의미하면서 도읍은 수도 혹은 나라를 뜻하므로 ‘계룡산에 팔백년의 큰 나라가 세워 진다’는 의미가 된다. 이처럼 계룡산의 영험과 상서로움은 새로운 세상을 갈망하는 백성들로부터 마음의 안식처가 됐고 미래의 희망, 백성이 중심인 국가로 한걸음씩 다가갈 수 있었다. 오늘날 우리는 선조들의 사상을 이해하고 진정으로 국민이 주인인 시대를 열어 갈 사명이 있음을 바로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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