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남대 명예교수
우리는 언제나 이상과 현실, 원칙과 실제생활, 진리와 일상생활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 때문에 고민하고 힘들어한다. 어느 누구도 이상을 싫어할 사람도 없고, 진리를 그대로 현실에 적용할 길을 찾지 않는 사람도 없다. 그런데 언제나 우리는 그것들을 실제 생활에 적용할 때는 지독히 어려운 점이 곳곳에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것이 커다란 갈등을 불러오기도 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위기상황에 부딪히기도 한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도 마찬가지다.
우리 모두가 잘 알듯이 동양의 고전 중 하나 ‘맹자’에 이런 대목이 있다. 제7편 이루편에 순우곤(淳于髡)이라는 사람과 맹자가 대화하는 장면이다. 순우곤: 남녀 간에 물건을 주고받을 때 직접 손으로 하지 않는 것은 예도이지 않습니까? 맹자: 예 그렇습니다. 순우곤: 그런데 형수가 물에 빠졌을 때 손을 잡아 건져줘야 합니까? 맹자: 형수가 물에 빠졌는데 손을 잡아 금방 건져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승냥이나 늑대지요. 남자와 여자가 직접 손으로 무엇인가를 주고받지 않는 것은 예도(禮道)지만, 물에 빠진 형수를 손으로 건져주는 것은 권도(權道)예요. 순우곤: 그렇다면 지금 세상이 물에 빠졌는데, 왜 선생은 그 세상을 건지지 않으십니까? 맹자: 형수가 물에 빠진 것은 손으로 건지는 것이지만, 세상이 물에 빠진 것은 도(道)로 건지는 것이지요. 선생은 물에 빠진 세상을 손으로 건질 수 있겠습니까? 이런 이야기다. 여기에서 중요하게 나타나는 말이 예와 권이라는 부분이다. 이것은 체와 용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러한 예는 예수의 행적에서도 상당히 많이 발견할 수가 있다. 간음현장에서 잡혀 온 여인을 돌로 치는 것이 좋으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죄 없는 자가 먼저 그 여인에게 돌을 던지시오’ 한 것이 그 한 예다. 규정에는 그런 사람을 돌로 치어 징치하라고 돼 있다. 또 안식일은 거룩하게 지켜야 하는 날이다. 그런데 예수의 제자들이 길을 가다가 배가 고파서 길가에 있는 보리이삭을 따서 손으로 비벼 먹었다. 그에 대하여 법도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아주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그때 예수는 ‘안식일의 주인은 누구요? 안식일의 주인은 사람이지 않아요?’ 배고픈 사람이 길가에 있는 먹을거리를 먹는 것과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법조문 사이의 갈등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이것은 바로 이상과 현실의 문제요, 진리와 실제생활의 문제면서 규칙과 실행의 문제다. 이 둘을 각각 다른 것으로 이분법화하고 흑백으로 보아 판단할 일은 아니다. 현실이 없다면 이상도 필요 없을 것이요, 이상이 없다면 현실생활은 참으로 혼란스러울 것이다. 이상이나 진리 또는 예도만을 아주 강력히 주장한다면 사람 사는 세상은 참으로 숨 막힐 정도로 답답하고 어두울 것이다. 그러나 항상 다르게 나타나는 현실부분만을 앞세운다면 혼란만이 가득할 것이다. 그러니까 이 둘은 항상 있어서 함께 조화하면서 매우 유연하게 적용되어야 할 사항이다.
나는 문재인 대통령이 후보 시절 고위공직자의 임명 원칙 5가지를 내세운 것은 잘했다고 본다. 그러나 그 원칙이라는 망에 걸리지 않을 사람을 지금 찾는 것은 매우 어려운 실정이다. 그렇다고 그 약속을 없는 것으로 처리할 수도 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렇게 주장한 근본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살필 필요가 있다고 본다. 꼭 고위공직자만 그렇게 흠결이 없어야 한다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 사회 전체에 일상의 사회문화로 뿌리를 내리고 있는 적폐 자체를 없애겠다는 것인지? 한동안 우리 사회에는 부동산을 매매할 때 이른바 다운계약이라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 알면서도 그렇게 했다. 그것을 고치겠다고 주장한 뒤에도 끊임없이 그런 일들이 있어났다. 심지어는 다운계약을 한 사람이 그것을 없애도록 행정을 추진하는 책임자가 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었다. 그것이 그 당시의 우리 사회문화의 공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허락되니 않는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여기에서 생각할 것은 바로 법도, 예도, 체라는 이상과 진리라는 원칙과 그것을 일상문화로 정착하기 위한 권도와 실용의 현실을 일치시키기 위한 전체의 노력이 어떠해야 할 것인가를 따지는 일이다. 사회문화가 그 모양이었으니 그 이상과 어긋나는 것을 무조건 양해해 달라는 것도 우습지만, 그 원칙을 지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저지른 꼭 같은 비리를 파헤쳐서 말을 못하게 하는 것도 우습다. 문제는 그러한 잘못된 관행을 우리 사회에서 없어지게 하는 데 함께 노력할 길이 어디에 있는지를 살필 일이다. 다시 말하면 잘못을 덮어주는 것이 아니면서, 그것 때문에 무조건 임명을 거부하는 것도 아닌, 그러니까 한 편으로 잘못을 철저히 거짓 없이 뉘우치고 양해를 구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잘못을 묵인하지 않으면서 전체 사회가 그 원칙에 맞는 사회로 갈 수 있는 길을 찾는 방법으로 국회청문회가 진행되고, 사회 전체의 흐름이 나가면 좋겠다. 너는 깨끗하냐 하고 반박하는 것도 우습지만, 지나간 일이니 덮어주면 좋겠다는 것도 옳지 않다. 이 둘을 다 인정하고 따지면서 공기처럼 쫙 깔려 있는 적폐의 관행을 어떻게 함께 극복할 것인가를 찾을 일이다. 여기에서는 여야라는 입장 때문에 무조건 찬성하고 반대하는 것을 넘어서야 할 것이다. 내세운 원칙이 전체로 확산하기 위한 방법이 공동으로 마련될 수 있는 것이 성숙된 자리로 가는 길이 될 것이라고 본다. 이번 일이 관행으로 돼 있던 적폐 중 하나를 극복하는 공론장이 되고 함께 노력하는 길을 찾는 계기가 되면 참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