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 드림' 품고…일자리 찾아 떠난 사람들

 

(지난회에 이어서) 읍장은 이 뷔히너의 가족 상황을 빠른 속도로 파악하고선 도움을 주려고 힘썼고, 그의 채권자와 타협하는 중재자로 나서기도 했다. 채권자를 부른 읍장은 뷔히너처럼 빚 있는 자에겐 “돈 받을 생각을 좀 접어라. 눈 딱 감고 이민 보내 버리자”라며 구슬렸다. 골똘히 생각해 본 채권자도 동의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 가족이 여기서 살아봐야 평생 빚 갚을 능력이 없다는 것을 충분히 짐작했기 때문이다. 당시는 이런 유사한 결정을 법원에서도 했다는데 42명의 죄수들을 이민 보내려고 했다. 이들이 형을 살고 나와 봐야 어차피 다시 도둑질이나 사기꾼으로 살아갈 확률이 크다는 것을 예견했기 때문이다.

즉 형을 살고 나와 이 마을에서 살아봐야 빵만 축낼 것이니 결과적으로는 사회적인 짐만 될 이들이니 희망 같은 것을 바라볼 여지가 더 이상 없다는 거다. 죄수들 역시도 이런 이민에 흔쾌히 동의했다고 한다. 이들에게 신발 한 켤레씩, 스타킹, 옷을 선물로 챙겨주었고 목사들은 성경책을 특별하게 선물했다. 이 마을의 읍장은 평소 잘 알고 지낸 간덴베르거라는 선장과 손을 잡았는데, 그는 유럽과 미국사이에 담배 무역업을 하던 배 소유주였다. 읍장은 머릿수만큼의 배 값을 선장에게 지불했다. 어른은 71굴덴에 열두 살까지의 아이들은 56굴덴이었지만 젖먹이는 공짜 배를 탔다는 기록까지 있다.

많은 세월이 흘렀다. 그로스-짐머른을 떠났던 이들의 소식은 미국에서 보낸 이들의 편지로부터 흘러 나왔다. 그사이 미국이란 땅에서 땀 흘려 부를 축적했던 대다수의 사람들은 독일에 있던 친척들에게 자랑스럽게 편지를 보냈다.

1788년에 쓴 편지를 보면, ‘미국에서 거대한 농장을 소유하고 있다. 많은 소와 28마리의 젖소까지 키운다’ 등등의 내용이다. 음식에 관한 얘기다. 빵보다는 고기를 더 먹고 있다는 것과 물보다 와인과 커피를 더 마신다는 내용이다. 가난의 상징인 빵과 물이 아니라 고기와 커피, 와인으로 한 단계 높아진 삶을 산다는 자랑거리다.

이런 편지 내용이 온 마을로 퍼져 나가자 사람들은 미국만 가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꿈에 젖어 들었다. 이런 꿈과 희망을 품은 이들이 다시 미국 이민을 지원했다. 1830년에는 1만 명가량의 독일인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미국에서 성공한 이들은 고향을 그리워하면서 모임도 만들었다. 당시의 뉴욕신문에 헤센출신의 요한헬드라는 이가 큰 강당을 빌려 헤센축제를 연다는 광고를 낼 정도였다. 이런 모임은 독일로 간 광부와 간호사들이 고향별로 연례행사를 여는 광고와 너무나도 유사하다.

미국으로 건너간 스물세 살의 하인리히레만이라는 청년도 1844년 동생과 함께 목화무역업으로 크게 성공했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보따리장수의 아들이었던 룁스트라우스 얘기도 빠지지 않는다.

당시에 그는 엄마와 두 여동생을 데리고 샌프란시스코로 떠났는데 이 가족은 청바지 사업으로 크게 성공했다. 오늘날 젊은이들이 즐겨 입는 ‘Levis’ 라는 상표가 바로 이 가족기업이라고 한다. 그 이후에도 독일인들의 이민은 끝이 없었다. <다음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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