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부대 교수

 

김진태의 ‘용 같은 저 반송아…’

용 같은 저 반송아 반갑기 반가왜라
뇌정을 겪은 후에 네 어이 푸렀는가
누구셔 성학사 죽닸튼고 이제 본 듯하여라

‘반송’은 키가 작고 가지가 옆으로 얇게 퍼진 소나무를 말한다. ‘반가왜라’는 반갑구나, ‘뇌정’은 심한 천둥 번개를 말한다. 성학사는 성삼문을 지칭한다.

용처럼 가지가 구불구불한 저 반송아, 너를 보니 참으로 반갑고 반갑구나. 그 모진 혹형에도 너는 어이 푸르른가. 저리 새파랗게 살아있는데 누가 성삼문이 죽었다고 말했는가. 이제야 그를 본 듯하구나.

반송을 성삼문에 비겼다. 성삼문의 ‘충의가’에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라는 구절을 이어받아 노래를 읊었다. 300년 전 성삼문의 절의를 읊었으나 엊그제 일만 같이 느껴진다. 절의가 사라져가는 세상이 안타까워 그런 노래를 읊었는지 모르겠다.

김진태는 숙·영조 때의 가인으로 자는 군헌, 호는 항은이며 서리 출신이다. 경정산가단의 한 사람으로 청구영언에 시조 26수가 전해진다. 18세기 가객 중 김천택, 김수장 다음으로 많은 시조를 지은 시인이다.

1766년(영조 42년)에 증보한 ‘해동가요’의 부록인 ‘청구가요’에 김수장이 자신과 직접적 교유 관계가 없었음을 아쉬워하며 그의 작품 성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군헌의 작품은 뜻이 뛰어나고 향운(響韻)이 매우 맑아 시속에 물들지 않았다. 지형이 험한 무협(巫峽)처럼 쓸쓸함과 울창함이 있고, 기이한 말과 아름다운 표현은 봉래산과 영주산에 사는 신선들의 말과 같다. 일찍이 서로 알고 지내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그의 시조는 변화무쌍한 세상사, 인심에도 욕심 없이 살고자 하는 맑은 마음이 그 주조를 이루고 있다. 늙음에 대한 자탄, 임금에 대한 충성과 절개, 문장과 경륜, 소망 등에 대한 것들이 있다.

벽상에 걸린 칼이 보믜가 났다 말가
공 없이 늙어가니 속절없이 만지노라
어즈버 병자국치를 씻어볼까 하노라

‘보미’는 녹을 뜻하고 ‘병자국치’는 삼전도의 굴욕을 말한다. 벽 위에 걸어놓은 칼이 녹이 슬었단 말인가. 나라를 위해 공을 세운 바 없이 늙어만 가니 속절없이 만져만 보게 되는구나. 아, 병자년의 삼전도 국치를 살아생전에 씻어볼까 마음먹어 보노라.

1637년 1월 30일 삼전도에서 항복 의식이 거행됐다. 온 백성들은 땅을 치며 통곡했다.

“조선 국왕은 계하에서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세 번 절하고 그때마다 세 번씩 모두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려 절하는 방식)케 하라.”

형제의 예에서 군신의 예로 바뀌는 치욕적인 순간이었다. 인조는 9배를 하고 군신의 예를 올렸다. 병자국치는 경술국치와 함께 두고두고 조선인들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100여 년이 지난 후이건만 시인은 삼전도에 대한 절치부심의 노래를 지어 자신을 반성하고 있는 것이다.

절의와 충의의 노래가 절실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현재는 과거의 역사이며 미래는 오늘의 역사다. 역사의 상흔은 세월이 흘러도 DNA가 돼 잊을 수 없고 지울 수도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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