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사상이 한반도에서 전개된 시점은 분명하지 않으나 고대로부터 내려온 민족적 종교인 무교(巫敎), 산천숭배, 삼신(三神)사상, 민속신앙 등 토착 종교 등과 유교(儒敎), 불교(佛敎), 선교(仙敎)와의 교류에 의해 우리 민족의 전통사상을 바탕으로 스스로 발생된 자생풍수(自生風水)의 흔적이 보인다. 신라의 토성이나 고구려의 고분벽화 속의 사신도와 최치원의 ‘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 등에서도 풍수적 사고를 찾아볼 수 있다. 우리 땅에 본격적인 풍수지리 이론은 우리 민족의 자생적 풍수와 함께 신라 말 도선 국사에 의해 중국의 풍수지리가 도입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고려 태조 왕건은 도선 국사의 영향으로 경주 지세의 쇠퇴와 개성의 번성에 대한 풍수설을 통해 개성에 도읍을 정하였다. 또한 오늘날 헌법과 같은 국가의 통치 이념적 지침서인 훈요 10조인 10개의 조항 가운데 풍수와 관련된 3개의 조항이 후대 왕들에게 전해지도록 하였다. 그 주요 내용을 보면, 서경(평양)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사계절에 한 번씩 순유(巡遊)토록 하였고, 모든 사원을 지을 명당 터를 선정할 때에는 도선 국사가 풍수에 맞게 지정한 곳 이외에는 창건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특히, ‘차현(車峴) 이남의 공주강(公主江:금강) 밖에 있는 산형과 지세는 모두가 도성을 등지고 배반하고 달아나는 모습이므로 인심 또한 그러한 것이다. 그 지방의 인재를 등용하거나 국정을 맡게 되면 국가에 변란을 일으킬 것이다.’라고 경계하였다. 이는 오늘날 차령산맥 남쪽과 금강의 남쪽 지방을 말하는 것으로 계룡산 지역 아래인 충청과 전라지역의 인재 등용을 막았고, 후일 왕조의 시대에 반한 감정이 쌓인 민중들에 의해 백성이 주인인 계룡산시대를 주창하게 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고려 중기에 이자겸이 십팔자위왕설(十八子爲王說)을 내세워 이(李)씨가 왕이 될 것이라는 도참을 믿고 난을 일으키므로 고려 사회는 정치, 사회적으로 큰 동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묘청은 이자겸을 중심으로 한 개경의 귀족 세력들의 권세와 횡포에 저항하기 위하여 ‘묘청의 난’이 일어났다. 그는 승려이면서 풍수 도참에 의한 개경의 지세가 약화되었으니 왕기(王氣)의 기운이 있는 서경(西京:평양)으로 도읍을 옮겨야 한다고 주장하며 대항하였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그 후 고려 중기 무신정권 시절에 경주 출신 이의민이 풍수도참을 인용하여 고려의 시대가 가고 이(李)씨가 나라를 얻는다는 구호를 내 걸고 경상도 일대 민심을 얻기 위한 방편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또한 당시 전국에서 산발적으로 봉기했던 신분해방 운동인 노비와 농민 봉기로 ‘만적의 난’ 과 ‘망이 망소이의 난’은 풍수지리와 도참사상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고려 시대의 풍수지리는 태조 왕건의 유훈으로부터 집권세력의 통치적 이념과 지배 세력에 반대하는 개혁 세력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의 정신 속에 깊이 각인이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정치와 사회 변화를 위한 세력에게 힘을 실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소외 계층인 민중의 힘과 저항력을 불러오는 계기도 마련하였다. 이처럼 풍수지리는 우리 민족에 있어서 신분의 높고 낮음을 떠나 모두에게 여러 방면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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