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세도정치의 출현으로 왕권이 약화되고 사회적으로 민심이 혼란한 시기에 풍수 및 비기(秘記)와 도참사상 등이 널리 유행했다. 흥선대원군(大院君)의 집정에도 풍수지리가 이용됐을 정도다. 아버지인 남연군(南延君) 묘를 이장하고 둘째 아들을 낳아 고종이 됐다. 그 후 대원군은 왕권강화와 쇄국정책 등을 시행했는데 독일인 오페르트는 대원군의 강한 기세를 누르기 위해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는 사건을 저질렀다. 비록 실패했으나 우리의 풍수를 외국인에 의해서도 이용됐음을 알 수 있다.

조선 말기에 접어들어 일반 민중들 사이에서 서양학에 반대하는 동학(東學)이 창시됐고 ‘사람이 곧 하늘이다.’ 라는 ‘인내천’ 사상으로 성리학의 윤리관뿐 아니라 민중들 가슴속 깊이 간직된 민간신앙과 풍수지리설을 기반으로 하는 ‘정감록’과 ‘개벽사상’을 널리 전파하고 세력도 크게 확장하게 된다.

조선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일본은 우리 민족정신을 말살하려는 정책을 시도했다. 전국적으로 풍수지리에 대한 방대한 조사를 실시했고 근대화와 토목공사라는 명분으로 주요 산천을 자르거나 변형했다. 심지어는 쇠말뚝을 박아 정기를 끊었다. 또 풍수지리 사상을 미신(迷信)으로 일축했고 한반도의 지형을 토끼형국으로 비하했다. 한반도의 주요 산맥인 백두대간(白頭大幹)의 형상은 단절하거나 변형시켰다. 일본은 조선의 재건을 막기 위하여 조선 500년 왕궁인 경복궁 앞에 총독부를 세웠고 뒤편인 혈처에 총독 관저를 세워서 기세를 눌렀다. 전국에 산재된 조선 왕실의 태실을 허물고 한 곳에 모아 관리했다. 이 모든 행위들은 우리의 풍수사상을 통해 민족정신을 말살하고 전통 문화와 풍속을 없애기 위한 정책이었다. 그 아픔의 총독 관저는 초대 이승만 대통령의 집무실인 경무대가 됐고 청와대로 개칭돼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지만 역대 대통령의 슬픈 역사를 함께하고 있다. 청와대 이전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는 대목이다.

일본으로부터 해방했지만 풍수지리 및 전통지리학은 학문적으로 설 자리가 없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우리의 것은 없어지고 일본인 학자들의 학맥을 이어받아 서양 지리학이 현재의 인문 지리학으로 정착돼서다. 우리 전통 지리학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끝으로 맥을 잇지 못했고 전통 산맥은 등산객이 이용하는 레크레이션 활동에 필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 지리학회에서 풍수지리를 마치 칼로 두부 자르듯이 명쾌하게 설명하라고, 그렇지 못하면 민족을 이용한 국수주의자로 매도하는 사례가 있다. 풍수지리는 우리 민족의 수난사와 같이 학문적으로 정착될 수 있을 여건이나 시기가 없었다. 현재 우리나라 초중고등 교과서 및 대학 강단의 지리학은 모두 일본식 교육을 거친 서양 지리학으로 채워져 있다. 이러한 실정에서 전통지리학과 풍수지리를 비과학적 학문으로 비하하는 태도로 그나마 어렵게 연구하고 있는 전통 학문의 면학 분위기에 찬물을 붓는 수고는 하지 말아야 한다. 틀림이 아닌 다름의 관점으로 서양 지리학의 장점과 우리의 전통 지리학의 장점을 결합할 수 있는 이해가 필요하다. 반만년 역사 속에 면면히 이어온 풍수지리의 학문적 사고가 어찌 쉽게 정착될 수 있을까, 지켜보고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하다.

살펴본 바와 같이 풍수지리는 우리 역사 속에서 위로는 최고 권력자로부터 아래로는 서민에 이르기까지 모든 계층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새로운 왕조의 통치 이념을 제공했고 민족의 주체성 확립을 위한 개혁자와 신분타파의 혁명적 사상의 기틀도 만들었다. 이는 곧 풍수지리가 우리민족에 있어서 상·하층 계급을 불문하고 정신적 지주의 역할을 담당해 왔음을 의미한다. 이에 풍수 연구가는 지리학뿐만 아니라 철학과 인문학에 대한 전반적인 연구의 폭을 넓혀 전통 지리학의 명맥을 유지토록 노력해야 한다. 국가와 국민은 전통지리학이 조기에 재정착될 수 있도록 물심양면 지원과 배려가 필요한 중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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