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이인회 취재부국장

 

“가끔 요즘 아이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 솔직히 우리 때는 지금처럼 취업 때문에 스트레스받지는 않았잖아. 질적인 차이야 있었지만 제 밥그릇은 찾았는데 말이야. 아등바등하는 모습이 안쓰럽다니까….”

술자리에 마주한 쉰 중반의 아저씨들이 잠시 고단한 삶의 무게를 내려놓고 ‘청춘’을 걱정했다. ‘한참 때’가 제일 듣기 싫어한다는 ‘우리 때’라는 전제가 섞이기는 했지만 아버지 세대들의 불콰한 음색엔 애잔함이 묻어났다.

내 코가 석 자인 머지않은 정년퇴직자들이 걱정을 이입할 만큼 일자리가 없다고 아우성이다. 취업 빙하기니, 고용 절벽이니 해서 특히 청년들의 일자리 사정이 곤궁하다. 또 다른 쪽에서는 일할 사람이 없다고 아우성이다. 주로 중소기업들이 뱉는 하소연이다. 손을 내밀어도 내켜하는 이들이 많지 않다고 한다. 중소기업도 신입보다는 경력을 선호한다니 청춘들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모질기는 마찬가지지만 그렇다고 진입장벽이 높은 것은 아니다. 구직난과 구인난이 맞대면하는 이 현상을 두고 우리는 일자리 미스매치라고 한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시간은 우리를 이 자리에 살게 하고 있다. 이런저런 부작용을 양산하기는 했으나 적어도 경제지수는 과거보단 현재가 낫다고 위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도 성장기를 관통해 내일모레 환갑인 세대들이 힘겹게 일자리 보릿고개를 관통하는 서른 안팎의 칠포세대들을 위로한다. 청년층만 놓고 보면 인구도 줄었고 가짓수와 자릿수로 보면 일자리는 늘었는데도 말이다. 더욱이 자식들을 건사하는 비용은 훨씬 늘어 부모 입장에선 가성비가 낮아도 너무 낮아 골치다. 이제 쉴 만도 한 부모들이 일해야 할 자식들 걱정하는 게 오늘 이 땅의 민낯이다.

일자리가 없다는 것은 주관과 객관 사이 관점에서의 ‘쓸 만한’이라는 단서가 붙어야 옳다. 밥그릇 사이즈의 문제일 수 있다는 것이다. 취업 걱정이 덜했던 세대들의 청춘지대에선 경쟁선상의 인구가 지금보다 훨씬 많았고 대학은 서넛 중 하나만 갔더랬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취업전선에 뛰어드는 축도 적잖았다. 공무원 시험 보겠다며 몰려들지도 않았고 다행히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임금격차가 그리 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른들이 제 밥그릇은 타고 나는 법이라고 했던 모양이다. 적어도 그 시절 언저리에서 일자리 미스매치라는 말을 들어본 기억이 없다. 일자리 미스매치는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죄다 대졸인 학력 인플레와 우리 경제의 빈익빈부익부 가속화로 인한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격차 등이 빚어낸 고약한 선택지라고 본다. 눈은, 혹은 눈만 높은 데 구멍은 좁고 못 오를 나무만 수두룩한 지경 안에 갇힌 청춘들에게 가지면 좋겠지만 갖기 쉽지 않은, 수저의 차이든, 역량의 차이든, 노력의 차이든 일자리의 결은 다를 수밖에 없다.

50∼60대 3명이 취업할 때 20대는 고작 1명이 취업했다는 통계가 나왔다. 장년층과 노년층이 노동 시장에 쏟아져 나오는 것은 그만큼 현실이 팍팍하다는 방증이다. 앞길 창창한 청년층의 취업과 단순 비교할 수 없지만 절박함의 무게는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 찬물, 더운물 가릴 처지가 아닌 탓이다.

고용문제가 우리 사회 전면에 등장하면서 역대 정권은 각종 정책을 쏟아냈다. 2015년 기준 청년층에 대한 고용시책이 300여 개에 달할 정도다. 그런데도 고용시장이 불안정해 청년들이 일자리에 목말라 한다면 진단부터 틀렸을지 모를 일이다. 고용의 질적 차이를 줄여나가면서 구인난과 구직난이 평행선을 그리는 기이한 현실을 바로잡아야 한다. 구직난을 호소할수록 구인난에 시달리는 경제까지 박탈감을 느끼는 법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권좌에 오르기 전 “‘고용 없는 성장’과 ‘성장 없는 고용’을 모두 거부하고 더 좋은 일자리를 만드는데 국가와 사회가 힘을 모아야 한다”고 일성한 바 있다.

적어도 미스매치라는 고르디우스의 매듭(Gordian Knot)을 끊어낼 만한 고용정책이라면 성군(聖君) 소리 들어 마땅하다.

이인회 기자 sindong@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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