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남대 명예교수

독일의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는 ‘책을 불태우는 곳에서 마지막에는 사람을 불살라 버린다’는 말을 남겼다. 약간 다르게 바꾸어 말한다면, 책을 금지시키고 지하실이나 광 속에 가두어 두는 곳에서는 결국 사람을 가두고 억압하게 된다. 그러나 불에 타서 재가 된 책은 되살아서 활동하고, 갇혔던 사람은 (정신과 육체가) 해방되어 자유를 누리면서 영향을 주지만, 책을 불사르고 사람을 감금한 그들은 결국 자기의 목숨을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되는 역사를 맞이한다. 그에 대한 아주 대표되는 역사상의 예는 중국의 진시황이 저지른 분서갱유(焚書坑儒)다. 자기들이 필요로 하는 사상체계의 책만 남겨 두고 나머지는 다 불태우고, 그러한 사상체계를 연구하고 개발하고 펼치는 사람들을 죽이거나 땅 속에 묻어버린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가깝게는 우리나라 조선시대의 사문난적의 사건이다. 당시 국가통치의 이데올로기로 삼던 성리학과 대치되는 모든 사상체계를 금지하고 그러한 책들이 퍼지는 것을 막았다. 그러나 그러한 조치를 취한 자들 스스로 자기들의 위치가 달라질 때는 언제나 금지한 그 사상체계와 책으로 몰래 빠져들기도 하였다.

더 가깝게는, 우리나라 군사독재시대에는 왜 그리 금서조치가 많았던지!? 그러한 책을 소유하기만 하여도 감옥에 가고 심각한 형을 받고 고난을 받으며 아주 심한 경우에는 사형을 받은 적도 있다. 지난 정권에서는 이른바 ‘문화계의 블랙리스트’라는 것을 작성하여 자신들의 정권을 평안하게 유지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역사의 흐름은 그렇게 녹록지가 않다. 그렇게 잔머리를 굴리고 좁은 맘으로 나라를 이끌려고 하는 대로 역사는 흘러가지 않는다. 그들이 그러한 권력의 자리에서 떠나기도 전에 매몰찬 역사의 흐름과 반란은 아주 엄혹하게 내려진다. 그래서 대통령이 자리에서 물러나고, 그와 함께 사악한 일을 도모했던 자들은 재판에 회부된다. 그러한 일은 지금 살아 있는 우리 사회의 일상현상으로 볼 수 있게 돼 있다.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날까? 그러한 일이 바로 우리에게서만 일어나는 특수한 현상일까?

지금 독일의 도시 캇셀(Kassel)에서는 ‘도쿠멘다(Dokumenta)’라는 예술작품전시회가 열린다. 이 전시회는 14회째로, 1955년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그때는 독일이 2차 대전에 패배하여 온갖 곳이 다 파괴되고 아직 회복되지 않았을 때다. 새로 건설하고 고치고 먹을 것을 많이 구하고 생산하고 찾아야 할 때다. 이때 아놀드 보데(Arnold Bode)가 창안하고 주장하여, 그렇게 피폐한 삭막한 세상일수록 예술혼이 발동하여 사람들을 치유하고 새로운 삶의 힘을 줄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온갖 비판을 극복하고 성립시켰다. 그렇게 하여 4년마다, 지금은 5년마다 이 전시회를 연다. 국제예술품 전시장이 되어 수십만의 관람객을 끌어들인다. 그런데 이번 전시회에서 아주 놀라운 작품 하나가 주 전시장 앞 광장에 조성되었다. ‘책의 파르테논’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캇셀대학의 문학과 예술학과에서 주관하여 금세기 전 세계의 금서들 2만 5000권을 모아서 조성한 것이다. 독재와 억압의 상징인 ‘금서’들을 모아서 민주주의의 상징인 고대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을 꾸민 것이다.

이러한 일은 처음 1983년 아르헨티나의 독재정권이 무너질 당시, Marta Minujin이 ‘El Partenon de libros’(The Parthenon of Books)라는 이름을 붙여 부에노스 아이레스 광장에 금서 2만 5000권으로 조성하였다. 독재정권에 의하여 금지되었던, 그래서 읽을 수도 소유하기도 매우 위험하였던, 그래서 창고나 땅 속에 있거나 독재 권력에 의하여 압수되어 보관되었던 곳에서 찾아낸 것들이었다. 시대의 변화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금서, 그것은 사상의 자유, 생각의 자유, 소통의 자유, 사람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기본 권력을 억압하는 것이다. 억압할 수 없는 것, 눌러서는 안 되는 것을 왜 독재자들은, 권력을 잠시 가지는 자들은 끊임없이 시도하고 또 할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생각하지 말라고 명령하고 지시한다고 생각이 끊어질까? 글을 쓰지 말란다고 사람들에게 생각이 있고 글이 있는 한 표현하지 않고 지나갈 수 있을까? 종이가 없으면 땅바닥에 쓰고, 연필이 없으면 나무꼬챙이로도 쓴다. 나치 때 강제수용소나 강제노역장에서 언제 어떻게 자신들의 운명이 결정될지 모르는 상황에 있던 감금된 사람들이 어두운 벽에 기록한 것들은 또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곧 예루살렘에 있는 ‘통곡의 벽’에 새겨진 손톱자국이며 생명의 흔적이다. 그것은 온 존재로 역사에, 하늘에, 자연에, 인류사회 전체를 향한 호소요 절규다. 그것을 막을 수는 없다. 책을 읽지 못하게 하는 것은 숨을 쉬지 못하게 하는 것과 같다. 곧 생명을 끊는 작태다.

그런데 왜 권력자들은 그렇게 어리석은 일들을 계속하고 있는 것일까? 금서현상은 왜 어디에서 언제 어떻게 일어나는 것일까? 그러한 일은 한계가 없는 듯이 보인다. 어느 특정한 시대, 특정한 장소, 특정한 사람들에 의하여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닌 듯이 보인다. 개명했다는 지금은 금서조치가 없을까? 금서에 속하는 책들과 그들이 품고 있는 내용은 특별한 것일까? 따지고 지나고 보면 모든 것은 아주 지극히 평범한 것들이다. 그런데 왜 금서가 됐을까? 그 책들의 운명도 참 얄궂은 것이지만, 그것을 시도하려는 그 인간의 작태가 또한 우스운 것을 지나 슬픈 일이다. 어떤 사상체계, 어떤 표현, 어떤 논의도 감추거나 금지될 수는 없다. 다만 그것들을 밝은 하늘에 드러나게 하여, 서로 논쟁할 것만 있을 뿐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밝고 맑고 자유롭게 행복한 사회를 스스로 만들면서 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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