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관섭(배재대 비서팀장·전 대전일보 기자)

이달 초에 벼르고 벼르던 서울 나들이를 했다. 어제 인사아트센터에서 끝난 ‘장욱진 백년, 인사동 라인에 서다’는 역시 기대했던 대로였다. 선생의 삶의 여정에 따라 덕소-명륜동-수안보-신갈 등 시대별로 전시공간을 꾸미고 작품을 전시, 화업畵業) 인생 전반을 한눈에 보여줬다. 하지만 선생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기획된 전시인 만큼 꼭 볼 수 있을 것으로 믿었던 ‘독’, ‘자화상(보리밭)’, ‘얼굴’ 등 초기의 몇몇 대표작을 볼 수 없었다. 아마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과 용인 고택 등 선생과 관련된 여러 곳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기념전이 열리고 있고 개인소장자들로부터 대여를 받기 어려웠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장욱진 탄생 100주년 기념전을 보고 나서 두 가지 상념이 머리를 맴돌았다. 먼저 작품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심플함’이다. 선생은 “나는 심플하다. 이 말은 내가 항상 되풀이 내세우고 있는 단골말 가운데 한마디지만, 또 한 번 이 말을 큰 소리로 외쳐보고 싶다. 나는 깨끗이 살려고 고집하고 있노라”라고 자신의 인생관과 작업관을 밝혔다. 선생에 있어 심플함은 단지 단순함만을 뜻하지 않는다. 절제와 정제, 여유와 비움을 함유하고 있으며 실천과 사유의 산물이다. 선생은 서울대 교수직도 버리고 평생 그림을 그리기 위해 순수하고 간결하게 살았다. 늘 자연을 벗 삼고 주변의 삶을 관조하여 얻은 결과물을 심플한 그림으로 말했다. 이런 선생의 작품을 볼 때마다 나 자신을 되짚어 본다. 갈수록 복잡해지고, 물욕이 판치는 삶 속에서 심플하기 위해 지금 어떤 노력하고 있는지를 말이다.

두 번째는 작가의 탄생과 작품의 배경에 대한 예술적 가치에 대해서다. 장욱진 선생은 우리 고장 출신으로 세종 연동면 송용리에서 태어났다. 아직도 생가가 건재하게 남아 있으며 연동면 응암리 선영에는 선생의 유골이 안치된 탑비도 세워져 있다. 한마디로 세종시 연동면은 선생이 태어나고 영면해 있는 아주 중요한 의미가 서려있는 곳이다. 더구나 선생의 가장 대표작으로 꼽히는 ‘자화상(보리밭)’의 배경이 바로 이곳이다. 이 작품은 선생이 6·25 전쟁의 혼란 중에 1951년 고향집에 머물면서 그렸다. 작품에는 황금 들판과 목가적 풍경, 연미복을 등장시켜 전쟁의 참혹함과 이상의 괴리를 해학의 정서로 표현했다. 선생의 고향 마을 주변은 속속 개발돼 급변하고 있지만 다행이도 자화상에 등장하는 들판은 아직 남아 있다. 세종시문화재단은 선생의 100주년을 기념하는 다양한 사업을 펼치고는 있다. 내판역에 주민들이 참여, 타일 700개로 만든 벽화를 설치했고 생가 앞에서 북 콘서트를 가졌다. 또 선생의 유년시절과 대표작을 조명하는 다큐멘터리 제작과 기획전을 준비하고 있다. 하지만 이곳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화가가 태어나고 대표작의 배경된 장소임을 알리고 선생의 업적과 예술세계를 체계화하여 문화 브랜드화시키는 작업은 아직 부족하다.

선생이 덕소시절을 보낸 경기도 양주시가 2014년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을 설립해 선생의 작품 전시와 수집 연구를 수행하면서 대표적인 문화공간으로 활용하는 것을 보면 못내 아쉽고 부럽기까지 하다. 신갈시절을 보낸 용인 장욱진 고택도 잘 보존돼 선생과 관련된 행사를 가지면서 지역의 대표적 문화 브랜드로 활용되고 있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도시의 성장은 물질적 팽창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 도시가 갖고 있는 문화유산을 근간으로 정신적 자산이 축적되고 확산돼야만 무한성을 갖는다. 세종시가 추구하는 본연의 모습을 갖추고 그 속에 살고 있는 시민들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주어진 문화적·정신적 여건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노력이 뒷받침될 때 가능하다.

오늘부터 장욱진 선생의 먹그림 한 점을 거실에 걸어놓고 그의 심플한 삶을 닮아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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