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네번 째 걸음] 대전 동구 주산동 (4구간)

연꽃은 불가에선 ‘극락왕생(極樂往生)’으로 향하는 선경(仙境)의 이정표를, 유가에선 ‘화중군자(花中君子)’라 칭하며 청아한 삶을 뜻한다.

워낙 신비한 색을 통해 아름다움을 뽐내기 때문에 이 같은 뜻을 내포했다. 아름다움은 상대적이라고 하지만 연꽃 앞에선 절대적인 기준으로 변할 정도로 연꽃의 자아는 남녀노소 모두가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불가나 유가에 따르지 않는 사람도 그저 연꽃이 주는 신비함에 넋을 잃고 바라보게 한다. 사상이 대비되는 불가와 유가가 연꽃을 두고 서로 다른 해석을 내놓았지만 결국 귀결되는 건 연꽃의 아름다움이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능적인 감정 자체를 건드린다. 아름다움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불가와 유가의 해석의 차이가 발생하는 것일 뿐이다.

대청호에서 극락왕생으로 안내하며 청아한 삶을 담은 연꽃에 흠뻑 빠져 속세에서 묻은 거짓된 것들을 털어낸다.

 

연꽃과 나눈 무언의 대화

"근심은 잠시 내려놓으시게"
앞만보고 뛰어온 당신에게
자연이 건네는 위로와 격려

 #. 결국은 아름다움 

봄을 밀어낸 여름이 점차 자리를 가을에게 내주기 시작한다. 한낮의 뜨거운 태양이 가장 높을 때 매미 소리가 귀를 괴롭히지만 식을 줄 모르던 열기가 모습을 감추면 귀뚜라미가 선율을 통해 귀를 간질인다.

새로운 계절의 주인이 성큼 다가왔음을 알라며 충만한 감성을 불러일으키며 들뜨게 한다. 그러나 이 시기의 대청호오백리길 4구간에 핀 연꽃은 마지막 수수함을 자랑하기 위해 바른 분을 열심히 뽐낸다.

연꽃은 진흙 속에서 자라면서도 청결하고 고귀한 식물로 꽃은 7∼8월에 핀다. 새 생명을 땅에 숨겨두고 내년을 준비하느라 마지막 불꽃을 불잉걸처럼 은은하게 자랑하는 셈이다.

땅에서는 귀뚜라미 등에 업혀오고 하늘에선 뭉게구름을 타고 오는 처서에 삶을 마감해야 하지만 속세에 인연이라도 뒀기 때문일까, 아니면 극락왕생으로 가는 길을 비밀로 간직해서일까. 연꽃은 무엇 하나 부끄럽지 않다는 듯이 황혼기에도 불구라고 꿋꿋하게 한창의 전성기처럼 아름다움을 뽐낸다.

비록 일부 연꽃은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겨 메말랐으나 이들도 시간의 속삭임을 듣지 않았다면 여전히 연분홍의 색을 뽐내며 극락왕생의 길을 간직한 채 신비로움을 뽐냈으리…. 아름다움을 앗아갈 때 동안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잘못을 야속한 시간에게 돌리며 속절없는 과거를 향해 불만을 터뜨린다.

연꽃에 시각을 집중하느라 타의적으로 둔해졌던 후각이 태동을 시작하자 연꽃의 향기 역시 강렬한 붉음도 아니고 연약한 분홍도 아닌 연분홍처럼 날 듯 말 듯 수수하게 느껴진다.

아가의 채취를 느끼고자 꼬옥 끌어안는 부모의 심정처럼 연꽃을 향해 가까이, 더 가까이 다가간다.

연꽃 향은 미처 부끄러움 많은 소녀처럼 수수하지만 이몽룡을 기다리는 춘향이처럼 수많은 꽃과 풀 냄새 속에서 꿋꿋하게고 절개 있게, 그리고 강렬하게 콧속을 후빈다. 용왕이 연꽃에 태운 심청은 이 연꽃 향에 취해 바다를 건너는 무서움도 잊었나 보다.
 

연꽃 밑 연꽃잎엔 초대받지 못한 연회에 몰래 참석이라도 한 듯 아침이슬이 조용히, 그리고 몰래 자리를 잡고 미동도 않는다.

나비가 불청객인 아침이슬 위에 사뿐히 앉아 목을 축이며 아침이슬을 쫓아 보낸다. 실 같은 빨대를 아침이슬 위에 꽂고 쭉 한 모금 들이키지만 불청객을 쫓아 보내기 위한 위엄은 전혀 없다.

오히려 연꽃과 연꽃잎, 아침이슬과 함께 고운 자태로 탄생하며 또 하나의 명경을 자랑한다. 나비는 한참이나 아침이슬에 앉아 불청객을 괴롭히고 연꽃에 올라 몸을 누인다.

나비도 아름다움에 이끌린 것이다. 하나하나가 모두 아름다워보이는 지금, 극락왕생이 있다면 이 같을까.

연꽃을 두고 불가와 도가가 다른 뜻으로 해석한 들 어떤가. 결국은 이 아름다움을 칭하기 위한 서술에 불과하다. 연꽃과 연꽃잎을 보며 속세에 찌든 때를 하나씩 벗고선 청아한 삶을 꿈꿔본다.

 ◆선경의 청아함 

연꽃을 충분히 각인하고 이들이 안내하는 극락왕생의 선경, 혹은 청아함의 길로 향한다. 4구간인 연꽃마을에서 5구간으로 향하면 황새바위로 안내하는 이정표가 나온다.

이정표를 따라 황새바위로 발걸음을 천천히 뗀다. 신비의 길로 향하는 발걸음은 첫 경험의 황홀함처럼 기대감에 부풀었지만 그 기대감을 더욱 팽창시키기 위해 아름다운 시 구절들이 길 옆을 지킨다.

각 시 구절은 각자의 주제를 갖고 서로 다른 노래를 부르며 감성을 살살 건드린다. 나룻배로 그대를 건넌다는 남자의 서사, 진흙 속에서도 결국 꽃을 피운다는 고운 마음의 노래, 손수건으로 시련과 눈물을 닦아 세상을 아름답게 해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속세에서 느꼈던 미움, 증오 등 검은 감정을 해탈하며 극락을 향해 조금씩 발걸음을 옮기면 청아함의 초입이 보이기 시작한다. 대청의 푸른 모습은 청아함 그 자체가 먼저 눈길을 잡는다. 대청의 청록이 솜사탕 같은 하얀 구름덩어리와 절경을 이룬다.

머리 위 푸른 침엽수는 가을에 자리를 뺏기기 싫은 늦여름의 심술을 막아주며 창틀을 자처한다. 침엽수란 창틀에 기대 대청호를 바라보며 움직이는 구름에 눈길을 준다. 시간이 멈춘 듯 잔잔하다.

그리고 공간도 정지한 듯 고요하다. 그러나 대청호를 쓰다듬고 도착한 바람이 두 볼을 때리면 얼른 정신을 차리고 미처 잊어먹고 있었던 발걸음을 다시 옮긴다.

시 구절의 선율에 몸을 맡기고 청아의 아름다움에 발을 떼기 시작하면 오름의 고행이 시작된다. 비록 높지 않아 숨소리는 고조까지 오르지 않지만 충분히 육신을 괴롭힌다.

극락왕생의 길은 고달프다. 그러나 중생들의 고난과 구박을 풀어주기 위해 세상에 왔다는 신화 속 부처에 비하면 이 얼마나 즐거운가. 고행 끝 낙이 온다는 말을 곱씹기를 20여 분, 극락왕생이 펼쳐진다. 선경인 황새바위다.

 

가을 초입 사색의 길 찾아 한 걸음
연꽃 만개 4구간 청아한 자태 뽐내
황새바위 가는길 묵은 감정 '훌훌'

마치 인간의 생사를 주관하는 성좌신(星座神)인 북두성군과 남두성군이 나란히 앉아 바둑을 두는 게 오히려 잘 어울릴 법한 곳이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선인들을 위해 술과 사슴고기를 내어 시중을 든 후 살생부에 이름을 지워 달라고 말한다 한들 전혀 이상하지 않다.

아니 오히려 더욱 이런 모습과 잘 어울리는 장소다. 탁 트인 대청호, 아직 오지 않은 가을처럼 높은 하늘과 구름이 조화를 이룬다.

극락왕생을 가기 위해 속세에서 수많은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고 절제의 삶을 지켰다면 충분히 보상 받았다는 느낌을 받게 한다.

정자에 앉아 한량이라도 된 듯 세월 따라 흐르는 대청호와 구름을 한동안 바라보며 사색을 즐겨본다.
 

연꽃이 안내하는 곳을 따라 결국 도착한 이곳이 종교에 따라 누구에겐 불가의 극락왕생 선경이, 또 다른 누군가에겐 유가의 청아함을 담은 곳일 수 있다.

그러나 신분제도가 엄격했던 조선 후기, 유교를 대표하는 유학자인 추사 김정희와 초의 스님이 수락산에서 처음 만나 숙연(宿緣)을 짐작했던 것처럼 종교에 상관없이 누구나 탁 트인 대청호의 공기를 나누고 서로의 마음을 주고 받아보자.

총평★★★★☆

연꽃마을은 연꽃의 색 자체로도 아름다움과 신비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제각각의 연분홍의 향연을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질 정도다. 인근의 황새바위와도 멀지 않아 출사로도 유명하다. 황새바위로 향하는 곳곳에 시가 있어 천천히 읽어보며 걸으면 낭만을 느낄 수 있다. 데크길이 곳곳에 설치돼 걷기에도 무리 없지만 데크가 없는 구간은 숨이 찰 수 있다. 황새바위에선 탁 트인 시야를 제공하는 곳으로 정자도 있어 간단한 요깃거리를 챙겨가는 게 좋다. 다만 아쉬운 점은 연꽃마을의 관리가 갈수록 소홀해진다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글=김현호 기자 khh0303@ggilbo.com
사진=노승환·김현호·신성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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