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이인회 취재부국장

곳곳에서 우리 사회 비정규직들이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간 침묵해온 것은 아니지만 어기찬 것이 최근의 그것은 불쏘시개를 제대로 만나 활활 타오르려는 불꽃처럼 다른 질감으로 다가온다. 도화선은 문재인 정부가 댔다. ‘비정규직 제로’라는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카드로 고용시장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이상적이고, 논란의 소지를 품고 있기는 하나 비정규직이라는 이름으로 억눌려 살아온 이들에게는 희망 그 이상의 가치를 이식하는 분위기다. 어둑한 게 익숙한 쥐구멍에 볕이 들면 한데 지천인 볕보다 농밀하고 따끈한 법이다. 비정규직들에게 한 줌 햇살은 그만큼 간절했다.

극단적으로는 반상(班常)의 계율에까지 비유되곤 하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차별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비정규직 품절’ 까지는 아니어도 차별이 덜한 세상이 마침내 열릴지 관심사다. 최고 권력의 비정규직이 걸머맡아 디자인한 기성복이 하층부 비정규직의 몸에 마침맞을지 말이다.

대한민국 대통령은 5년 단임의 비(非)정규직이다. 대한민국 국회의원과 지방자치단체장, 지방의원의 임기는 모두 4년이다. 역시 비정규직이다. 대통령과 달리 연임이 가능하지만 선거라는 혹독한 인사위원회를 통과해야 가능한 일이다. 여차하단 중도에 낙마하는 수가 있고 임기를 채워도 재계약을 보장받지 못하면 실업자가 된다. 우리는 이 집단을 싸잡아 정치라고 말한다. 절대 권력이든, 절대 권력이 아니라고 하는 절대 권력이든, 그 권력의 주변부 권력이든 정치를 기반 삼아 선거에 응시하는 이들은 모두 비정규직이다. 정치하는 비정규직들이 나라를 운영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프레임이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진짜 비정규직들은 많이도 신음하고 많이도 아파했다. 표를 먹고 사는 권력형 비정규직들에게 설움을 먹고 사는 갑남을녀 비정규직은 잘도 속는 유권자였을 뿐이었을지 모른다. 권력, 특히 정치권력을 어디로 휘두르느냐는 한 국가와 사회가 나아가는 희망과 절망 사이 이정표가 되곤 한다. 때론 잘 되면 내 탓이고 뒤탈이 나면 애먼 국민들의 몫이라고 탄식한다. 누굴 탓할 수 없는 것이 유권자는 국민들이다. 제 손으로 뽑은 비정규직이 감히 상투를 흔들 때마다 찍소리 못하고 자괴감만 적립했다면 돌아볼 문제다. 잘 뽑은 비정규직 하나 열, 백, 천, 만 정규직 부럽지 않기를 소망하는 것은 비단 중대 기로에 선 비정규직만은 아닐 것이다.

환영부터 능사는 아니라는 우려까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그 실제와 실행을 바라보는 시선은 다양하다. 빛이 있는 곳에 그늘이 진다. 최저임금 1만 원을 향한 질주처럼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이런저런 우려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통령이 직심스럽게 진두지휘하는 자세만으로도 최소한 위약효과는 발휘됐다고 본다.

드라이브가 너무 급하고 강하다는 힘 조절 문제부터 경제가 돌지 않는 복지는 없다는 균형의 문제까지 복지를 강조하는 새 정부의 기조를 일각은 걱정스럽게 주시한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도 복지로 간주할 수 있다. 혹자는 ‘빈대 잡으려고 초가삼간 태운다’며 새 정부 출범 이후 경제계 간수하는 법을 나무라기도 한다.

새는 좌우 날개로 난다. 어느 한 쪽의 날개가 커지거나 줄어들어 균형감각을 상실하면 비행할 수 없다. 약자에게 가중치를 주든 강자에게 페널티를 주든 국민들이 납득할 만한 선이 유지되는 결과여야 탈이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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