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 한켤레 끝까지 AS…고객만족, 철학을 바꾸다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쳤던 한 소년이 있다. 그러나 삶은 소년에게 늪이었다. 불량배들에게 감시당하며 구두닦이를 해야 했다. 죽어라 도망쳐 신발 관련 일을 배웠지만 사람들은 소년을 천대했다. 그러나 소년은 주눅들지 않았다. 세상이란 늪을 헤치며 이를 악물었다. 죽어라 일을 했고 공부를 했다. 그 부단한 노력의 끝, 어두웠던 그의 삶에 희망이란 빛이 스며들었다. 당당히 한 기업의 직원이 됐고, 사업에 도전해 어엿한 대표로 꿈을 그렸다. 꿈을 이뤄가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어려움도 마주했지만 그는 대표와 가장이라는 책임감을 갖고 위기를 극복하고 있다. 김상현(48) ㈜나눔터 대표가 들려준 삶은 오늘을 사는 젊은이들에게, 또 기업인들에게 자극이 되기 충분해 보였다.

#. 보호자 없던 아이…‘신발’이란 희망의 빛을 발견하다

‘버려진다'는 것의 의미를 제대로 인지 못 했을 열세 살 나이에 김 대표는 부모의 이혼으로 보호자 없는 신세가 됐다. 그는 남들보다 어두웠던 ‘자신의 과거’를 담담히 술회해 나갔다. “어릴 적 부모님이 이혼해 저와 동생들만 남게 됐습니다. 돈벌이를 하려고 13살 때 전라도 장성에서 혼자 서울로 상경했어요. 집을 나섰을 때 11살, 7살 동생들이 따라왔습니다. 돌멩이를 집어 던지면서 ‘오지마, 오지마’라며 떼어냈습니다.”

돈이 없어 몰래 기차를 숨어 탄 후 12시간이 걸려 도착한 서울. 당연하게도 시작부터 순탄치 않았다. 검표과정에서 차표를 끊지 않은 것이 발각된 것이다. 누군가 그의 푯값을 대신 내줬지만 대가없는 호의가 아니었다. 값을 치러준 이는 불량배들이었다. 김 대표는 “건달들이 서울로 상경한 저를 데려가 구두닦이를 시켰습니다. 감시당하고 폭행당하는 날이 많았습니다”라고 당시를 떠올렸다. 보호자도, 지인도 없이 불량배들에게 매맞는 생활에서 희망이란 빛은 보이지 않았다. 하루 이틀, 한 달 그리고 어언 일 년이 지나도록 수렁은 깊어만 갔다. 김 대표의 마음속에서는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 없다’는 갈망이 솟구쳤다. 어느 날 하루 용기를 냈다. 건달들로부터 도망쳤다. 영등포 오목교 아래로 숨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새로운 일을 찾았다. 어두웠던 그의 삶에 한줄기 빛이 돼 줬던 것. 바로 신발공장이었다. 김 대표와 신발과의 질긴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김 대표는 “그때는 신발이 재밌어서가 아니었습니다. 다른 데 가면 점심때 김치에 밥을 주곤 했는데 신발공장은 먼지가 많기 때문에 뼈다귀 감자탕을 줬습니다. 처음 먹어본 뼈다귀 감자탕 맛 때문에 신발공장에서 일했고 급여도 나쁘지 않아 일을 계속했습니다”라며 웃음지었다.

김 대표는 신발공장의 고된 업무 속에서도 배움에 대한 열정을 삭히지 않았다. 자신 같은 가출인에 대한 사회의 편견을 넘어서고 싶다는 바람이 한몫했다. “가출한 친구들을 사람들이 심하게 무시하곤 했습니다. 학생들은 존댓말을 해주면서, 우리 같은 애들을 함부로 대했죠. 이것이 공부를 한 이유입니다.”

김 대표의 독기는 중학교,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합격하는 동력이 됐으리라.

#. 동생 찾아 광주로, 그리고 꿈 찾아 온 대전에서 ㈜나눔터를 설립하다

서울에서 일을 하며 자리를 잡아가던 16살 김 대표는 어린 동생들이 광주 큰아버지 밑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동생들의 안부가 걱정돼 행방을 수소문했던 그의 마음을 가볍게 하는 일이었다. 김 대표는 “광주에 와서 살자”는 큰아버지의 제안을 받아들여 광주에 새롭게 보금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광주의 한 프랜차이즈 신발유통회사에 취직해 ‘신발’과의 인연을 이어나갔다. 그러던 1993년, 김 대표가 근무하던 회사가 갑자기 부도를 맡게 되는 일이 있었다. 당시 실무자였던 김 대표는 대리점을 추슬러 ‘공급을 해 줄 테니 거래합시다’라고 설득했고 자연스레 사업의 길로 뛰어들었다.

김 대표는 처음 광주에서 터전을 잡고 일을 시작했지만 지난 2001년 큰 결단을 내린다. 광주의 사업장을 정리하고 대전으로 향한 것이다. 김 대표는 “광주에서는 판매망이 한정적이었지만 대전은 지역적 특성상 전국적인 판매망을 갖출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판단은 주효해 3개월 만에 나름의 시장 확보를 했다.

비결은 고객의 마음을 움직인 데 있었다.

“광주에서는 오랜 기간 함께한 거래처들이 있었지만 대전은 신규 개척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고객에 대한 설득이 필요했어요. 운전하고 가다가 시장을 들어가서 ‘저는 이런 제품을 만드는데 단가는 얼마입니다. 당신이 거래하면 이런 장점이 있습니다’를 설명했습니다. 판매교육과 디스플레이 2가지를 얻는다는 말과 행동을 보여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김 대표는 이런 노하우를 바탕으로 지난 2013년 ㈜나눔터를 설립했다. 그의 회사는 굴지의 제화 회사에 납품계약을 체결하고 국내판매점에 10개점을 납품하는 등 탄탄대로를 걸었다. 지난 2014년에는 회사를 확장하고 판매점 수를 늘려나갔고 이듬해에는 벤처기업인증과 연구전담부터 인증, 그리고 판매점 수를 130여 개까지 늘렸다. 또 지난해에는 대전시 유망중소기업 인증을 받았다. 신소재 식물가죽으로 신상품 개발 및 특허를 추진하는 등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는 나눔터다.

꿈은 멈추지 않는다. 김 대표는 남들과는 다른 목표를 세웠다. 그는 “국내에서는 프렌차이즈 매장들이 많이 어렵습니다. 신상품이 나오면 후속제품이 안 나오는 것도 한 원인”이라며 “저희는 한번 팔고 멈춰지는 마케팅이 아닌 저가제품 할인 행사를 하는 대형마트 공간을 활용할 계획입니다. 좋은 제품을 저렴하게 판매한 후 AS 등을 통해 소비자를 관리하고 싶습니다. 신발을 중저가로 만들지만 신상품을 만들 기술이 있고 비전이 있습니다”고 꿈을 말했다.

#. 위기의 극복 비결은 ‘가장이라는 정체성’, “젊은이들 자기 정체성 찾기를”

㈜나눔터를 설립하기 이전 사업과정에서 큰 위기가 닥쳤던 적이 있다. 자금이 바닥나 위기상황을 맞은 것이다. 신발사업가라는 정체성이 흔들렸고 삶이 고단했던 시기라고 김 대표는 당시를 기억한다. 힘들었던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남편과 아버지라는 이름의 가장. 그 ‘정체성’ 하나였다.

“당시 자금도 바닥나고 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습니다. 신발사업가의 정체성 흔들렸습니다. 남편과 다섯 아이의 아버지라는 정체성이 마지막에 남아있있어요. 아이들과 아내에 의지해 많이 울었습니다. 만약에 제가 죽으려면 이 두 가지를 버려야 했습니다. 책임감 때문에 이를 놓고 싶진 않았습니다. 내 밑바닥을 보여주고 다시 시작했습니다.”

김 대표는 그렇게 다시 우뚝 섰다. 그 과정에서 배운 점도 있다. “실패의 원인은 외부적인 요인이 아니라 내 자신에 있는 경우가 많다는 점입니다.”

불모지에서 피어난 잡초 같은 삶, 그 어려운 삶을 이겨내고 CEO로 삶을 영위하는 그가 젊은 세대에게 어떤 조언을 건네줄지 자못 궁금했다. 김 대표는 ‘자기 정체성의 발견’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는 “꿈과 신념을 통한 자기정체성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꿈과 신념이 있어야 자기가 누군지 알고 이게 잘 결합돼야 도전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어떤 직업이든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지요”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우러난 교훈을 전한다. “자기가 누군지 헷갈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이 일을 왜 하지, 잘할 수 있는 일일까, 직업을 바꿔야 하는 것은 아닐까 헷갈립니다. 슬럼프나 어려운 일을 당하면 정말 힘들고 우울해집니다. 자기정체성을 발견하십시오.”

어떤 상황에서도 꿈을 저버리지 않는 김 대표에게 내일은 희망이다.

글=곽진성 기자 pen@ggilbo.com·사진=전우용 기자

 

모델명‘MRO100BK’, 인체공학적 기능을 갖췄고 실리콘 소재로 신고 벗기가 편한 드레스 구두라는 것이 업체 측의 설명이다.

㈜나눔터는.

서구 도산로 160에 있다. 3대 경쟁력을 슬로건으로 수제화, 안전화, 숙녀화 등의 각종 신발을 생산·납품·유통하는 기능성 구두 전문 기업이다. 국내 판매점 공급은 물론 기능성 구두와 특허안전화로 아시아 및 중국시장 수출판로를 개척하고 있다. 디자인 특허 상표들을 등록한 벤처 인증 기업이자 대전시 유망중소기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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