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형 청운대 교수

 

“그분은 어떤 분이었는지 사실대로 말씀해주십시오?”(‘오뒷세이아’ 3권 101행) 텔레마코스가 아버지인 오디세우스에 대해 묻는 말이다. 텔레마코스는 그때까지 아버지를 만난 적이 없었다. 트로이 원정이 끝났지만 오디세우스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었다. 그는 편하게 앉아서 아버지의 귀향을 무작정 기다릴 수 없었다. 자신의 해야 할 일을 찾아 나서야 할 때가 된 것이다. 그것은 아버지 소문을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원정에 참여했던 사람을 찾아가 소식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텔레마코스가 맨 처음 한 일은 네스토르와 메넬라오스를 찾아가 아버지에 대해 묻는 것이었다. 네스토르는 트로이 원정에 참여했던 최고령 장수로 정의와 지혜가 누구보다 뛰어나 현명하다고 알려져 있었고 메넬라오스는 원정에 참여했던 장수 중에서 맨 나중에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라면 아버지에 대한 소식을 누구보다도 잘 전해줄 것이라고 짐작했다. 텔레마코스는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고 아버지인 오디세우스가 원정에서 어떠했는지 말해달라고 물었다.

두 사람은 오디세우스에 대해 자신들이 보고 들은 것을 있는 그대로 말해주었다. 그리고 텔레마코스를 자신의 아들인 것처럼 환대했다. 거기에 텔레마코스의 여행과 귀향을 염려하여 자신의 아들을 동행시켜 주는 호의와 자기 보물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값진 것을 주는 호의를 베풀었다. 그것은 텔레마코스를 얼마나 귀하게 여겼는지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원정에서 두 사람에게 쌓았던 레거시(legacy:업적, 남겨놓은 것 혹은 유산) 덕분이었다.

텔레마코스는 두 사람으로부터 그 어떤 사람보다 큰 호의를 받았다. 그가 받은 것보다 오디세우스를 더 잘 설명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오디세우스가 원정에서 쌓았던 레거시가 그의 아들에게 전해진 것이다. 그런 레거시를 받는 순간 텔레마코스는 아버지에 대한 자부심이 커졌을 것이다. 그것은 그가 집을 떠나기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집을 떠나지 않았다면 구혼자들 속에서 여전히 걱정이나 불평만 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아무런 일을 하지 않으면 어떠한 레거시도 받지 못하는 법이다. 아버지의 레거시를 받는 순간 텔레마코스는 마침내 성년이 되었다.

시대를 막론하고 누구나 자신의 레거시가 자녀들에게 전해지기를 원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한순간에 쌓여 쉽게 전해지지 않는다. 레거시는 일을 통해서 쌓여지고 행위를 통해서 전해지기 때문이다. 쉽게 쌓여지는 것이 아니기에 자신이 가진 것을 다 내어 놓고 평생 동안 쌓아야 한다. 레거시가 그것을 쌓은 사람의 평가와 직결되는 이유이다. 따라서 무엇을 남겨놓을 것인가 혹은 무엇을 물려줄 것인가는 그 사람의 인품과 그릇에 따라 달라진다.

힘들게 쌓아올린 레거시라 해도 쉽게 무너지는 경우를 역사 속에서 숱하게 보아왔다.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秦始皇)이 그의 후손에게 대대로 전해주려 했던 무소불위 권력은 오래지 않아 아방궁과 함께 불탔으며 일본 전국시대를 평정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그의 아들에게 물려주려 했던 레거시도 오사카성과 함께 무너졌다. 로마 최고의 철인 황제라 일컫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의 절대적 지지와 후원을 받았던 코모두스(Commodus)는 자신의 실정으로 말미암아 암살당하고 말았다. 지금도 주변에서 상속의 문제로 다툼이 끊이지 않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자신의 레거시를 자녀에게 물려주는 것이나 받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말해주는 예다.

권력이나 빌딩과 같이 물질적인 재산을 물려주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바르게 살아가는 지혜를 남겨 주는 것이다. 그것은 정신적인 것과 정서적인 레거시를 포함한다. 전자는 일을 함으로써 기쁨을 느끼는 것, 새로운 기회를 발견하는 것, 일에서 만나는 사람과 신뢰를 쌓는 것을 말한다. 후자는 물려받은 레거시라 해도 그것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모두의 것이라는 인식 아래 타인을 돕고 사회에 기여하여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이다. 어떤 레거시던지 자신만의 성을 쌓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마음에 성을 쌓는다면 그것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레거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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