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암 행정학 박사

 

부모, 즉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식을 기준으로 한다. 그럼으로 자식이 없으면 부모가 될 수 없다. 자신이 어떤 상황을 직접경험해 보지 않고 간접경험을 통해 표현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이는 자식을 낳아 길러보지 않은 사람이 부모 마음을 알 수 없다는 말과 맥이 통한다.

동양, 특히 우리나라의 부모에게 있어 자식은 자신의 분신과도 같다. 분신은 신체를 나눈 또 하나의 자신이다. 하지만 부모는 자신보다도 분신인 자식을 더 사랑한다. 어떻게 자신보다 분신을 더 사랑할 수 있을까? 어떻게 자식을 위해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목숨을 내던질 수 있을까? 이론적으로는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90먹은 어머니가 70먹은 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차 조심하고 일찍 들어와라.”

그러면 아들은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뭐 어린애예요?”

부모에게 자식은 영원히 보호해야 할 물가의 아기이기 때문일까? 자식이 나이를 먹어 백발이 돼도 부모에게 자식은 아기로 보여서일까? 그래서인지 부모는 자식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몸과 마음, 자신이 평생 동안 이룬 모든 것을 주고 싶어 한다. 부모에 따라 자식을 위하는 방법이 다를 뿐, 사실은 다 줘도 아깝지 않다.

부모는 자식을 통해 꿈을 꾼다. 자식을 통해 꾸는 꿈은 본인이 이루지 못한 부분에 대한 대리만족을 하기 위함이다. 자식에게 거는 기대는 부모가 달성한 업적에 비례하는 경우가 많다. 업적이 작은 부모와 업적이 큰 부모가 자식에게 거는 기대의 크기는 상대적으로 다르다. 여기서의 업적은 부모 스스로가 노력해 쌓은 정신적·물질적 수준을 말한다. 그래서 소위 자수성가형 부모는 자신에게 미치지 못하는 자식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어려서 숟가락 몽둥이 하나 물려받지 않고, 학비도 스스로 벌어 다니며 이만큼 일궈냈다. 근데 너는 원하는 대로 풍족하게 다 해주는데 그게 뭐냐!”

그러므로 스스로의 업적을 많이 쌓은 부모일수록 자녀에게 거는 기대의 크기도 크다.

부모는 자식의 능력을 실제보다 더 크게 생각함으로 자식에게 거는 기대를 웬만해선 포기하지 않는다. 자식에게 거는 기대와 욕심이 큰 부모일수록 자식이 과거의 자신보다 더 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만족하지 않는다. 솔직히 자신은 과거에 공부를 잘하지 못했음에도 자식만큼은 공부를 잘할 것으로 믿으며 극성스럽게 과외를 시킨다. 부모가 악착같은 이유는 자식을 통해 대리만족을 하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자식이 자신보다 더 행복하게 잘살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극성스럽고 악착같은 기대, 쉽사리 포기하지 않는 욕심, 그것이 바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모의 사랑이다.

부모는 자식의 아픔을 보고 견디지 못한다. 자식의 아픔은 부모에게 배가되어 자식이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고통을 받는다. 자식의 고통이 자식이 못나서 초래된 결과라면 부모는 자식을 탓하기보다는 자신을 탓한다. 자식의 고통이 외부의 물리적인 힘 때문이라면 부모는 세상에서 가장 용감한 장수가 돼 적(?)과 혈투를 벌인다. 자식의 고통은 부모에게 피눈물을 흘리게 한다.

부모는 자신에게도 부모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식에게 하는 것처럼 자신의 부모에게 공을 들이지 못한다. 자신의 부모가 자신에게 모든 것을 주고 피눈물을 흘렸음을 알지만 내리사랑이란 본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부모는 자신의 부모가 죽고 나서야 비로소 부모를 찾는다. 부모는 자신의 능력으로 더 이상 자식을 이끌어 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어쩔 수 없이 자식에게 의지한다. 그러나 자신의 의지(依支)가 자식을 곤경에 빠뜨려 고통을 준다고 판단되면 조건 없는 희생을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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