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 코 길이로 본 신분 차이

당시 유럽의 거리는 늘 오염되어 냄새가 진동했기에 이런 곳을 피해 굽 높은 구두를 신었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기에 생략한다. (이런 굽 높은 구두가 지금 독일 프랑크푸르트 근교의 오펜바흐에 가면 박물관에 잘 전시되어 있다. 필자가 직접 찍은 중세 신발사진 하나를 보고 지나가자. 이런 신발의 코 길이가 신분에 따라 달리 사용했는데, 신분이 높으면 코 길이가 길고, 낮을수록 짧은 코길이였는데 이런 길이조차도 위에서 정했다니.)

길거리를 보자. 오물이 질퍽질퍽하고, 돼지들이 지나가면서 뿜어낸 오물들과 뒤엉겨 불쾌한 냄새가 진동하니, 시에서 이런 규정을 정한다.(1411년에는 자기 집 앞의 오물은 8일내에 처리하라! 이것으로도 거리는 냄새의 진동이 멈추지 않았던지, 다시 1413년에는 오물처리의 기일을 3일 내로 처리하라는 규정을 내린다.)

지금의 프랑크푸르트는 당시의 이런 상황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대개는 깨끗한 편이다.

하지만 이런 시대도 있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위에서 한 번 언급했듯이 문화는 진화과정을 거치는 것이 분명한 듯하다.

이런 환경이다 보니, 이들이 팔려고 내어놓은 생고기 위에는 파리들이 들끓는다. 이런 음식 때문에 아니면 쥐 때문에 유럽전역에 전염병이 퍼져 전 인구의 3분의 1이 죽어나가던 시대도 있었다. 가뭄, 홍수 등등의 자연재해 때문에도 많은 이들이 죽어갔다. 이렇게 종잡을 수 없는 날씨 때문에 먹고사는 문제가 심각해지자 점성학자들에게 일기예보를 맡긴 시대도 있었다. 오늘날로 치면 점성학자들이 바로 기상청 역할을 했던 셈이다. 과학이 발달한 지금도 자연재해는 속수무책이라는 것을 우리는 매스컴을 통해서 잘 안다.

하지만 이들은 대개는 신의 분노와 저주로 생각했다 보니, 교회가 주선이 되어 신의 저주를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교회가 나서서 신이 노여움을 풀고 자비를 간구하는 거리 행렬이 진행되기도 했다.

13시경, 이렇게 중세의 시장을 신나게 다니는 그에게 다시 환자가 생겼다는 전갈이 날아 왔다. 이번 환자는 우리가 프랑크푸르트 갔을 때 꼭 들르는 룀머베르크(Roemerberg)다. 이곳은 당시의 부자들이 모여 살았던 소위 부촌이다. 환자가 있는 이 집에 들어서는 알트하우스 의사도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나무가 아닌 돌로 지은 집일 뿐만 아니라, 멋진 침대에 이불까지도 보들보들한 깃털 이불과 아름다운 창문들이기 때문이다. 앞 환자의 집엔 창문은커녕, 짚으로 감아 놓았던 구멍이지 않았던가.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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