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나라

금강일보는 베이비부머 세대의 효와 사랑 이야기를 담은 임석원의 자전적 에세이 ‘나는 내 아내가 너무 좋다’를 온라인판을 통해 연재합니다. ☞본보 2017년 8월 9일자 10면 보도

1955년부터 1963년 사이에 출생한 우리나라 베이비붐 세대는 한국전쟁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격변의 시대를 관통하며 살아온 세대로, 임석원의 에세이는 그 시대에 태어나 하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도 많았겠지만 자신을 위해서는 한 가지도 해 보지 못한 채 오직 가족만을 위해 굳세게 살아온 한 남자의 자전적 이야기이자, 곁에서 묵묵히 좋은 동반자가 되어 준 아내에 대한 절절한 고마움을 전하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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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나라

사우디에 온 지 세 달쯤 지난 어느 날 나의 사수인 자재과 변 과장이 아침 과장 회의를 마치고 와서 나에게 말했다.

“임석원 씨, 내일이나 모레 제다에 좀 다녀와야겠어. 현장에서 마블 언제 들어오느냐고 난리야. 경리과에서 오늘 자금 확인하고 결재해준다고 했으니까 확인해 보고 결재되는 대로 은행에 가서 선적서류 찾아와. 선적서류 받는 대로 제다 통관사에 갖다 줘야 해. 처음이니까 내가 함께 가야 되는데 일이 바쁘니 혼자 갔다 와. 통관사에는 내가 전화해 놓을게.”

사우디로 수입해 들여오는 자재는 대부분 서부의 제다와 동부의 담맘(Dammam) 항구로 들어온다. 대개 유럽에서 선적하는 물품은 제다로, 한국과 아시아 쪽에서 싣는 자재는 담맘으로 들어온다. 리야드에서 제다와의 거리는 약 1000㎞이고 담맘까지의 거리는 약 450㎞다. 담맘에 업무 보러 갈 때는 항공편으로 다녀오기도 하고 운전기사가 운전하는 자동차로 다녀오기도 한다. 통상 하루 만에 일을 마치고 올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일이 많을 때는 호텔에서 자고 며칠 동안 일을 보기도 한다. 제다는 자동차로 갔다 오기엔 너무 먼 거리다. 제다에 일 보러 갈 때는 비행기를 타고 간다. 하루에 일을 다 마치더라도 그날 돌아오는 항공편이 없을 수 있기 때문에 제다에는 빌라 한 채를 임차해 두고 자동차도 한 대 사 뒀다. 제다로 일 보러 갈 때는 집 열쇠와 차 키를 갖고 갔다.

1980년 8월 18일 나는 혼자 제다로 출장을 가게 됐다. 제다는 사우디에서 수도인 리야드 다음으로 큰 도시였다. 사우디 온 지 겨우 세 달 좀 지난 때였다. 내가 아는 말이라곤 ‘살람 알리이 꿈’(당신에게 평화가 있기를), ‘슈크란’(감사합니다) 등 인사말 정도였다. 제다 공항에 도착해 회사 빌라로 가려면 택시기사에게 어디로 가라고 지시를 해야 했다. 변 과장은 ‘알라뚤’(앞으로), ‘야민’(왼쪽으로), ‘야사르’(오른쪽으로) 등 방향을 가리키는 세 단어를 가르쳐 줬다. 사우디는 관광지도 아니어서 제다 지도를 구할 수도 없었다. 변 과장이 빌라의 위치를 설명하면서 빌라 약도를 그려 줬다. 약도와 방향을 가리키는 단어를 적은 메모를 갖고 빌라로 찾아가야 했다. ‘뭐든지 해낸다’라는 마음을 먹고 비행기를 탔다. 제다 공항에 내려 택시 기사에게 약도를 보여주면서 “알라뚤”, “야민”, “야사르” 세 마디를 하며 겨우 빌라를 찾아갔다. 빌라에 들어가 통관 회사와 전화통화를 했다. 통관 회사 직원에게 공항을 출발점으로 해 회사 위치를 알려달라고 했다. 리야드에서 싸 갖고 간 토스트를 점심으로 먹고 빌라를 나와 생전 처음 온 이국 도시에서 길을 찾아 나섰다. 빌라 앞에 세워둔 회사차를 찾아 타고 설명 들은 대로 운전해 갔다. 중간에 길을 잘 못 들면 낭패다. 그렇지만 나는 해냈다. 통관 회사의 우리 회사 담당자와 만나 마블 선적서류를 전달하고 긴급 통관을 부탁했다. 또 통관 중인 물품들의 운송 스케줄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물품을 통관하는 항구 세관에 함께 가 보자고 했더니 미리 예약을 해야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나는 들어가 보진 못해도 항구와 세관의 위치는 알아야겠기에 담당자로부터 위치 설명을 듣고 혼자 가 봤다. 불현듯 바다를 바라보며 혼자 자유를 느끼고 싶었다. 항구 입구에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경치 좋은 바닷가가 어디 있는지 물었다. 항구 앞 복잡한 거리를 벗어나 바닷가에 차를 세우고 홍해를 바라보며 한참을 서 있었다. 그런데 친절하게 바닷가 위치를 가르쳐 줬던 사우디 사람이 나를 따라와 있었다. 그 사람은 더 좋은 데가 있다며 안내해 줄 테니 자기 차를 타라고 했다. 나는 내 차로 따라가겠다고 앞서 가라고 했다. 그는 자꾸만 북쪽으로 갔다. 시내를 벗어나니 사막이 나왔다. 해가 지려는 시간이었다. 나는 덜컥 겁이 났다. 사우디에선 남자도 강간을 당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때 사우디에는 외국인 비율이 80%나 됐다. 대부분의 외국인은 남자들이었으니 사우디에는 남녀 비율이 90대 10인 셈이었다. 또 사우디의 부잣집 남자들이 아내를 네 명씩이나 데리고 사는 바람에 장가를 못 간 사우디 남자들이 많았다. 그러기에 키가 작고 귀여운 외국인 남자들을 납치해 강간한다는 것이었다. 그날 나는 당시 우리나라에서 유행하던 반도패션의 하얀 미색 바지와 변 과장이 유럽 출장 중 스위스 에어 항공사에서 기념품으로 받아와 나에게 준 빨간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러니 무척 귀여운 젊은이로 보였을 게다. 나는 차를 홱 돌려 오던 길로 도망을 쳤다. 하지만 그 녀석이 금방 따라왔다. 과속방지턱이 나타나자 급브레이크를 밟는 바람에 차가 튀어 오르면서 머리가 차 천정에 쿵 하고 부딪혔다. ‘T’ 자로 고가도로가 시작되는 지점이어서 과속방지턱이 없었다면 전방 고가도로 아래 벽에 정면충돌해 죽었을지도 모른다. 우회전해 네거리 신호등에 멈춰 서자 그 녀석도 놀랐는지 내 옆에 차를 세우고 안 따라갈 테니 천천히 가라고 손짓을 했다. 갑작스러운 사건으로 전혀 알 수 없는 지점에 서 있게 됐다. 나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길을 묻고 도로표지판을 따라 일단 공항으로 갔다. 그리고 오전에 택시를 타고 간 길로 우리 빌라를 찾아갔다. 빌라로 가는 길에 조그만 마트에 들러 일본 라면과 싱가포르 라면, 계란을 샀다. ‘집에 있는 쌀로 밥을 하고 라면으로 국을 삼아 저녁과 아침을 해결해야지.’

다음 날 오전 제다 건설자재시장을 둘러보러 나섰다. 어제 통관 회사에서 알려준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브랜드가 있는 건설자재를 파는 큰 상점들이 모여 있는 거리(우리나라의 청계천이나 을지로 같은 곳)를 찾아갔다. 우리 회사가 관심을 두고 있는 자재를 파는 상점들에 들어가 상담을 하고 명함을 확보해 두려는 의도였다. 오전 이른 시간이어서 손님들이 많지 않아 좋았다. 열 군데 남짓 들어가 건축, 전기, 설비, 토목 등 각종 자재와 공기구, 건설장비 등을 구경하고 설명도 듣다 보니 금방 낮 12시가 됐다. 이슬람 사원 모스크에서 스피커로 크게 이슬람 기도 시간을 알리는 소리(‘아잔’이라고 함)가 들렸다. 모든 상점들이 문을 닫고 상점 주인과 직원들이 근처 이슬람 사원 모스크로 기도(‘살랏’이라고 함)하러 갔다. 이슬람교인들은 하루 다섯 번(새벽이나 동틀 때 - 정오 - 오후 - 해질 때 - 저녁) 기도를 드린다. 나도 얼른 나와 점심으로 샤와르마(Shawarma, 큰 꼬챙이에 양고기나 닭고기를 수직 방향으로 꽂아 불 옆에서 돌려서 익히고 익은 부분을 깎아내 야채와 함께 속을 넣은 즉석 버거)와 콜라를 사 들고 집으로 향했다. 샤와르마와 펩시콜라(코카콜라는 이스라엘 자본으로 된 기업이라고 해 이슬람 국가에는 수입금지 품목이다)는 중동 지방에서 점심으로 많이 먹던 거리 음식이다. 오전 내 자재 골목을 돌아다녔으니 온 몸과 옷이 땀으로 젖었다. 집으로 돌아와 먼저 샤워를 했다. 샤와르마로 점심을 먹고 한숨 자고 리야드행 비행기 시간에 맞춰 공항으로 나갔다. 어! 그런데 공항청사 입구에서 경찰 두 사람이 들어가는 사람 한 사람 한 사람 신분증 검사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나는 신분증이 없었다. 여권은 회사에서 보관하고 사우디 거주 근로 허가증 ‘이까마(Work Permit)’는 아직 발급받지 못했다. 나는 사정을 설명하고 리야드행 비행기 티켓을 보여주며 출발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고 들여보내 달라고 했다. 경찰은 신분증이 없으면 못 들어간다고 버스를 타고 가란다. 아니 1000㎞나 되는 거리를 버스를 타고 가라니? 버스 터미널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무전 여행객도 아니고 무슨 버스로 가라는 말인가? 화물 터미널 쪽으로 들어가 보려고 시도했으나 더 여의치 못했다. 거기는 커다란 출입문을 닫고 경찰이 총을 들고 경비를 서고 있었다. 결국 시간은 가고 예정된 비행기는 출발했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 내일 가야 하나? ’, ‘내일도 이와 같은 상황이라면 비행기로는 못 가는 것 아닌가? ’, ‘내일이 된다고 무슨 방도가 생기는 게 아니잖은가’, ‘어떻게 들어갈 방법이 없나? ’ 고민하면서 공항 건물 밖에서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늦은 오후가 되면서 도착해 나오는 사람은 여전히 많았지만 비행기 타려고 들어가는 사람들이 줄자 경찰 한 사람은 어디론가 가고 한 사람만이 남아 있었다. 들어가는 사람들이 뜸하게 되자 그는 공항 입구 한쪽에 갖다 놓은 높은 탁자 뒤 의자에 앉았다. 탁자는 학교 조회시간에 단 위에서 교장선생님이 연설하던 것과 같은 그런 높은 탁자였다. 나는 그의 뒤편으로 갔다 그리고 그의 시선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그가 다른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고 무언가에 취해있는 순간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몸을 최대한 낮춰 숙이고 탁자 밑으로 살금살금 기어 잽싸게 마치 도둑고양이가 먹이를 낚아채듯 청사 안으로 뛰어들어가 바로 군중 속으로 파묻혔다. 제다에서 리야드로 가는 비행기는 하루에 열 대도 넘게 운행된다. 아직도 두 편 정도가 남아 있었다. 나는 사우디 에어라인 카운터로 가 놓친 비행기 티켓을 내놓고 늦게 와서 예정된 비행기를 놓쳤다고 말하고 리야드 가는 비행기 좌석이 있냐고 물었다. 카운터에선 바로 다음에 출발하는 비행기 탑승권을 발급해 줬다. ‘야호!’ 오후가 아닌 저녁에 지사에 돌아왔더니 변 과장이 반갑게 나를 맞으며 물었다.

“아니? 어떻게 이제 왔어? 전화도 안 되고 걱정 많이 했는데….”

내가 자초지종을 얘기했더니 변 과장은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임석원 씨는 참말로 용해! 리야드 공항에서 비행기 폭발사고로 리야드 공항뿐 아니라 사우디 전 공항에서 검문검색이 강화됐는데 그 검색망을 뚫고 돌아오다니….”

“그래요? 저는 그런 사고가 난 줄도 모르고 이까마가 없다고 제다 공항에서 안 들여보내 주기에 어떻게 오나? 하고 오후 내내 마음만 졸였어요.”

“임석원 씨, 어제 가길 잘했지 오늘 가려고 했다가 그 폭발한 비행기 탔으면 어쩔 뻔했어? 오늘 그 비행기가 제다로 가려던 비행기였대. 이륙해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기내에서 화재가 났다는구먼. 리야드로 회항해 비상 착륙했는데 승객들이 내릴 새도 없이 착륙하자마자 바로 폭발했대. 승객과 승무원 301명 전원이 사망했다는군. 관리부장과 직원들 모두 ‘임석원 씨 제다 간다더니 그 비행기 탄 건 아니지? ’ 하고 걱정했어.”

‘세상에! 하루 차이로 생사가 왔다 갔다 했구나.’ 다음 날 변 과장과 나는 리야드 공항 외곽 언덕에서 폭발한 비행기를 바라봤다. 이 비행기 사고는 지금까지 세계 역대 항공사고 중 여섯 번째로 큰 사망자 수를 낸 사고였다. 희생된 한국인도 4명이나 됐다. 그 시절 사우디에는 우리나라 86개 회사가 나와 있었고 한국인 근로자가 10만여 명이나 됐다. 그러니 이런저런 사고로 종종 한국 사람이 희생되기도 했다.

이런 위험한 나라 사우디에서 나는 3년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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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임석원은...

1956년 지리산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다. 대전고와 한남대를 졸업한 후 1980년 S그룹 S건설에 입사해 23년을 근무하면서 사우디·싱가포르·인도네시아 등 8년간 생활했다. 2003년 영국 유통회사 B&Q 구매이사, 2004년 경남 S건설 서울사무소장으로 일했다. 2009년 H그룹 H건설에 입사해 리비아에서 자재·장비 구매업무를, 2011년 E그룹 E건설에 입사해 중국과 동남아 대외구매를 담당했고, 2013년에는 전북 J건설 소속으로 사우디에서 근무했다. 지금은 34년 직장생활을 마감하고 미군부대에서 계약직으로 근무하면서 여러 분야의 책을 읽고 토론하는 분당 판교지역 독서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인생 후반기엔 ‘책 읽고 여행하고 글 쓰는 삶’을 계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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